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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망설이지 말고 일단 행동에 옮기자

 

뇌는 변화를 싫어하기에 어떤 일을 할때 처음에는 어느정도 일을 하다가

몇일 뒤면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행동을 일단 해버리면 도파민이 분비되어 

어떤 행동을 계속하게 하는 힘을 준다 

 

2. 기존의 습관에서 약간 바꾸어 본다 

 

뇌는 변화를 싫어하여 어떤 일에대해 거부하지만 미세한 변화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방어를 하지 않는다

 

3. 앵커링 효과를 이용하자

 

앵커링 효과는 배가 어느 지점에 닻을 내리면 움직이지 못하듯이, 인간의 사고가 하나의 이미지로 박혀 판단에 그 영향을 받는 현상인대

어떤 일을 하는곳이 항상 정해져서 그곳에서는 일만하는 경우에는 습관적으로 일을 계속하게 된다

 

4.  다음에 하더라도 조금은 해둔다 

 

어떤 일을 할때 조금이라도 해두면 뇌는 했던 일에 대해 알던 일이라고 판단하여

저항이 낮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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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208년) 봄 정월, 공이 업으로 돌아와, 현무지(玄武池)를 만들어 주사(舟師-수군)를 조련했다

한(漢)나라에서 삼공(사마,사도,태위의 최고위 정책 결정)의 관직을 폐지하고 승상(내정 총책임), 어사대부(감찰과 법,문서 담당 - 승상이 문제가 있을때 승상대리)를 두었는데, 여름 6월, 공을 승상으로 임명했다

 
가을 7월, 공이 남쪽으로 유표(劉表)를 정벌했다.
 
8월, 유표가 죽자 그 아들인 유종(劉代)이 대신해 양양에 주둔하고, 유비는 번(樊-양양성 북쪽의 한수 북쪽 연안)에 주둔했다.
 
9월, 공이 신야(新野-형주 남양군 신야현)에 이르자 유종은 항복하고 유비는 하구(夏口-한수가 장강으로 유입되는 입구)로 달아났다. 공이 강릉(江陵-형주 남군 강릉현)으로 진군하고, 형주의 관원과 백성들에 하령해 경시(更始-고쳐서 다시 시작함)하도록 했다. 
 
이 에 형주를 복종시킨 공을 논해 15명을 후(侯)로 봉하고, 유표의 대장인 문빙(文聘)을 강하(江夏)태수로 삼아 본래 군사들을 통솔하게 하고, 형주의 명사(名士)인 한숭(韓嵩), 등의(鄧義) 등을 발탁해서 임용했다.
익주목 유장(劉璋)이 처음으로 징역(徵役-징발)을 받아들여, 군사들을 보내서 군에 공급했다.
 12월, 손권이 유비를 위해 합비(合肥-양주 구강군 합비현)를 공격했다. 공이 강릉에서부터 유비를 정벌하여 파구(巴丘)에 이르렀고, 장희(張喜)를 보내 합비를 구원했다. 손권은 장희가 온다는 말을 듣고 이내 달아났다. 
 공이 적벽(赤壁)에 이르러 유비와 더불어 싸웠는데 불리했다. 이때 큰 역병이 돌아 관원과 군사들 중 죽은 이가 많았으므로 이에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유비가 마침내 형주(荊州)와 강남(江南-장강 남쪽)의 여러 군(郡)들을 차지했다.

14년(209년) 봄 3월, 군이 초(譙)에 이르렀다. 경주(輕舟-가볍고 빠른 배)를 만들어 수군을 조련했다. 

 
가을 7월, 와수(渦水-회수의 지류)로부터 회수(淮水)로 들어가 비수(肥水)를 빠져나와 합비에 주둔했다. 
 
신미일(???), 영을 내렸다 (※ 존휼령 存恤令 or 존휼종군리사가실령 存恤從軍吏士家室令)
 
- 근래에 군이 수차례 정벌을 행하는 와중이나 혹은 역병을 만나, 관원과 군사들이 죽어 돌아오지 못해 집안에는 원망이 가득하고 백성들은 흩어져 떠도니, 어진이라면 어찌 이것이 즐겁겠는가? 부득이한 일일 뿐이다. 죽은 이들 중 집안에 기업(基業-기반이 되는 생업)이 없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가 있으면, 현(縣)의 관아에서는 양식을 대어주고 장리(長吏)들은 이들을 존휼(存恤-위문하고 구제함)하고 어루만져 내 뜻에 부합되게 하라.
 
양주(揚州)의 군현에 장리(長吏)를 두고 작피(芍陂)에 둔전(屯田)을 열었다.
 

 

12월, 군이 초로 돌아왔다.
  
15년(210년) 봄, 하령했다 (※ 구현령 求賢令) 
 
- 예로부터 천명을 받거나 중흥(中興)한 임금 중에서 현인(賢人), 군자(君子)를 얻어 그들과 함께 천하를 다스리지 않은 자가 일찍이 있었던가? 현인을 얻고자 함에 그들이 여항(閭巷-여염집-일반백성의 집)을 나오지 않는다면 어찌 요행히 서로 만날 수 있겠는가? 윗사람이 그들을 구하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니 특히 현인을 급히 구해야 할 때이다. (논어 헌문편에서) 
 
“맹공작(孟公綽-춘추시대 노나라 대부)은 (진晉나라의) 조(趙)씨, 위(魏)씨의 로(老-가신들의 우두머리)가 되기에는 넉넉하나, 등(滕)이나 설(薛)의 대부(大夫)를 이기기에는 부족하다”
고 했다. 만약 반드시 염사(廉士-청렴한 선비)인 연후에만 기용할 수 있다면 제환공은 어찌 패업을 이루었겠는가! 지금 천하에 갈옷을 입고 옥 같은 마음을 품은 채 위빈(渭濱)에서 낚시질하는 자가 없겠는가? (강태공 비유) 형수를 도둑질하고 금을 받고 아직 무지(無知-위무지)를 만나지 못한 자가 또한 없겠는가? (위무지에게 추천받은 진평이 누명을 써서 관영과 주발등에 비난받음 )

그대들이 나를 돕고자 한다면, 측루(仄陋-출신이 한미함)한 자라도 오직 재주가 있으면 천거하여(唯才是擧) 내가 그들을 얻어 기용할 수 있도록 하라. -

 
겨울, 동작대(구리로 만든 참새 건물)를 만들었다

16년(211) 봄 정월, 천자가 공의 세자인 조비(曹丕)를 오관중랑장(궁중 수비 및 단속)으로 삼고 관속(오관 중랑장 내 신하?)을 두어 승상을 돕도록 했다. 

태원(太原)의 상요(商曜) 등이 대릉(大陵-병주 태원군 대릉현)에서 모반하자 하후연, 서황을 보내 이를 포위해 격파했다. 장로(張魯)가 한중을 점거하니 3월에 종요(鍾繇)를 보내 장로를 토벌했다. 공이 하후연 등에게 하동(河東)에서 나와 종요와 합류하게 했다.
 
이때 관중(옹주)의 제장들은 종요가 습격하고자 하는 것으로 의심하니, 마침내 마초(馬超)가 한수(韓遂), 양추(楊秋), 이감(李堪), 성의(成宜) 등과 함께 모반했다. 조인(曹仁)을 보내 이를 토벌케 했다.
마초 등은 동관(潼關)에 주둔했는데 공이 제장들에게 경계해 말하길, 
 
“관서(關西)의 군사들이 정예하고 사나우니, 견벽(성벽을 굳게 지키고)하고 더불어 싸우지 말라.”
 
고 했다. 
 
가을 7월, 공이 서쪽을 정벌하여 마초 등과 더불어 관(關)을 사이에 끼고 진을 쳤다. 
 
공은 급박하게 대치하는 한편, 몰래 서황(徐晃), 주령(朱靈) 등을 보내 밤중에 포판진(蒲阪津)을 건너 하서(河西)를 점거해 둔영을 세우게 했다. 
 
공이 동관에서 북쪽으로 강을 건너려 했는데 미처 건너기 전에 마초가 배를 향해 달려와 급박하게 싸웠다. 이에 교위 정비(丁斐)가 우마(牛馬)를 풀어 유인하자 적들이 우마를 취하느라 어지러워졌고 이에 공이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황하를 따라 용도(甬道-담을 양쪽에 쌓아 만든 통로)를 만들며 남쪽으로 진군했다. 적이 물러나 위구(渭口-위수가 황하로 유입되는 입구)를 지켰다. 이에 공이 의병(疑兵-속이는 군사)을 여럿 두고는, 배에 군사들을 태워 몰래 위수(渭水)로 들어가 부교(浮橋)를 만들고, 밤중에 군사를 나누어 위수 남쪽에 둔영을 세웠다. 적이 밤중에 둔영을 공격하자 복병(伏兵)으로 이를 격파했다. 마초 등은 위수 남쪽에 주둔하며 서신을 보내 황하 서쪽을 떼어줄 것을 요구하며 화해를 청했으나 공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9월, 진군하여 위수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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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양중하느라

1층에서 맨바람 받고 있는대

이제 온도도 -10 이하로 떨어져서

돈 아낄께 아니고 방한 대책을 세워야하는게 맞다는 판단에

 지벤 스즈키 6만원에 주문했고 

시범으로 한번 입고 돌아다녔는대여

하나도 안뚤려요

아무튼 얼굴 손 발 빼곤 무적입니다 

스즈키복 사세요 꼭

 

왜 이걸 이제야 안걸까;; 갓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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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그인방법시 지문인식을 하지말고 간편비밀먼호로 해본다

2. LG폰 어떤 기종은 보안이 걸린상태로는 qr코드가 열리지 않는다 

보안이 풀리고 qr을 실행한다

3. 아이폰으로 근로자 가입후 안드로이드 중복가입하여 인증함

그 후 계정이 중복되어 문제 일으킴 - 데스크(02-3458-3000)에 전화하여 계정 매핑 정보 삭제 요청

 

오류들 문의는 데스크 02-3458-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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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가 공을 영(領-겸직의 의미) 기주목(冀州牧)으로 임명하자 공이 연주목은 반납했다. 
 
공이 업을 포위했을 때 원담이 감릉(甘陵), 안평(安平), 발해(勃海), 하간(河間)을 공략하여 차지했다. 원상이 패하여 중산(中山)으로 물러나자 원담이 이를 공격했고, 원상이 고안(故安-유주 탁군 고안현)으로 달아나자 (원담이) 그 무리를 아울렀다. 공이 원담에게 서신을 보내, 약속을 어긴 것을 꾸짖으며 혼인관계를 끊었고, 딸을 (원담에게로) 돌려보낸 뒤 진군했다. 원담이 이를 두려워하여 평원을 함락했다가 물러나 남피(南皮)를 지켰다. 
 
12월, 공이 평원으로 입성하고 여러 현들을 공략해 평정했다.
 
10년(205년) 봄 정월, 원담을 공격해 격파하고 원담을 참수하고 그 처자를 죽이니 기주가 평정되었다.
하령(下令)하기를, 
 
“원씨와 함께 악을 저지른 자도 더불어 경시(更始-고쳐서 다시 시작함)하도록 하라”고 했다.
백성들이 사사로이 복수하지 못하도록 하고, 후장(厚葬-호화로운 장례)을 금하니 모두 법에 의거해 한결같이 하였다. 
 
그달에 원희(袁熙)의 대장 초촉(焦觸), 장남(張南) 등이 모반하여 원희, 원상을 공격하자, 원희, 원상은 삼군(三郡)의 오환(烏丸)에게로 달아났다. 초촉 등이 그 현을 들어 항복하자 열후에 봉했다. 
 
당초, 원담을 토벌할 때 얼음 깨는 일을 하지 않고 달아난 백성(이 노역을 꺼려서 도망)들이 있었는데 투항 해와도 받아들이지 말도록 영을 내렸다. 
얼마 후 도망갔던 백성들이 군문으로 나아가 자수하자 공이 말했다, 
“너희들의 청을 들어주면 내가 영을 어기게 되고, 너희들을 죽이면 자수한 이를 죽이는 셈이 되는구나. 깊은 곳으로 돌아가 숨어서 관원들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하라.”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떠났는데 그 뒤 결국 붙잡혔다.

여름 4월, 흑산적 장연(張燕)이 그 무리 10여 만을 이끌고 투항하니 열후에 봉했다. 고안(故安)의 조독(趙犢), 곽노(霍奴) 등이 유주자사, 탁군태수를 죽였다. 삼군의 오환이 광평(獷平)에서 선우보(鮮于輔)를 공격했다. 

가을 8월, 공이 이를 정벌해 조독 등을 참수하고, 노하(潞河)를 건너 광평을 구원하자 오환이 새(塞) 밖으로 달아났다.
 
9월, 영을 내렸다 (※ 정제풍속령 整齊風俗令)
 
- 아첨하는 무리들이 당파를 짓는 것은 옛 성인들이 미워했던 일이다. 내가 듣기로, 기주(冀州)의 풍속은 아버지와 아들조차 부(무리)를 달리하여 서로 비방한다고 한다. 옛날 직불의(直不疑-전한 초 인물)는 형이 없었으나 세인들은 그가 형수를 도둑질했다고 했고, 제오백어(第五伯魚-후한 초 인물인 제오륜第五倫)가 고아에게 세 번 장가들자 과부옹(장인을 구타함)이라 했다. 왕봉(王鳳-왕망의 백부. 전한 때 대사마대장군으로 외척)이 제멋대로 권세를 휘두르자 곡영(穀永)은 그를 신백(申伯-주선왕 때 명신으로 외척,충신;;)에 비유했고, 왕상(王商)이 충성스러운 말을 하자 장광(張匡)은 그가 도(道)를 그르친다고 했다. 이들 모두는 흰 것을 검은 것이라 하여 하늘을 기만하고 임금을 속인 것이다. 나는 풍속을 정제(고칠)하고자 하니 이런 네 가지 일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나는 이를 수치로 여길 것이다.

겨울 10월, 공이 업으로 돌아왔다. 

 
당초 원소는 생질(누나의 아들)인 고간(高幹)을 병주목(幷州牧)으로 삼았었는데, 공이 업을 함락하자 고간이 투항했고 이에 고간을 (병주)자사(刺史)로 삼았다. 고간은 공이 오환을 토벌한다는 말을 듣고는, 병주를 들어 모반하여 상당태수를 붙잡고, 군사를 일으켜 호관구(壺關口)를 지켰다.
 
11년(206년) 봄 정월, 공이 고간을 정벌했다. 고간이 이를 듣고 그 별장(別將)을 남겨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흉노로 들어가 선우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선우는 거절했다. 공이 호관을 석 달 동안 포위해 함락했다. 이에 고간은 형주로 달아났으나 상락도위(상락의 장교인대 변방일때는 현지태수가됨) 왕염(王琰)이 그를 붙잡아 참수했다.
 
가을 8월, 공이 동쪽으로 해적(海賊) 관승(管承)을 정벌해 순우(淳于-북해국 순우현)에 도착했다. 악진, 이전을 보내 이를 격파하자 관승은 바다의 섬으로 달아났다. 동해(東海)군의 양분(襄賁), 담(郯), 척(戚)현을 떼어내 낭야(瑯邪)군에 더하고, 창려군(昌慮郡)을 없앴다. 
삼군(三郡)의 오환(烏丸)이 천하가 어지러워진 것을 틈타 유주(幽州)를 격파하고 한민(漢民-한나라 백성) 10여 만 호를 약탈해 소유했다. 원소는 그 추호(부락의 우두머리)들을 세워 선우(單于)로 삼고, 먼 친척 자식을 자기 딸로 삼아 그들에게 처로 주었다. 요서(遼西) 선우 답돈(蹋頓)이 특히 강성하여 원소에게 후한 대접을 받았는데 이 때문에 원상 형제들이 그에게 귀의했고 수차례 새(塞) 안으로 들어와 해를 끼쳤다. 
 
공이 이를 장차 정벌하고자 하여, 수로를 뚫어 호타(呼沱)로부터 고수(泒水)로 들어가게 하고 이를 평로거(平虜渠)라 명명했다. 또한 구하(泃河) 입구로부터 로하(潞河)로 들어가게 해 천주거(泉州渠)라 명명하고 바다로 통하게 했다. 
 
12년(207년) 봄 정월, 공이 순우(淳于)로부터 업으로 돌아왔다. 
 
2월 5일, 영을 내렸다 (※ 봉공신령 封功臣令)
 
- 내가 의병을 일으켜 폭란을 주살한 지 지금까지 19년이 흘렀는데, 정벌하여 반드시 이긴 것이 어찌 나의 공이겠는가? 이는 즉 현사(어진 선비) 대부(귀족)들의 공이다. 천하가 아직 모두 평정되지는 못했으니 나는 응당 현사 대부들을 맞아들여 함께 천하를 평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공로를 나 혼자 누린다면 어찌 내 마음이 편하겠는가! 시급히 공을 정해 봉작을 행하도록 하라. -
 
이에 큰 공신 20여 인을 봉하여 모두 열후로 삼고, 그 나머지는 각각 순서대로 봉했으며, 전사한 자의 고아는 경중에 따라 각각 차등을 두어 보답했다.
장차 북쪽으로 삼군의 오환을 정벌하려 하자 제장들이 모두 말했다, 
 
“원상은 도망간 적에 불과하고 이적(夷狄)들은 탐욕스러울 뿐 친애함이 없으니 어찌 원상이 이들을 능히 부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깊이 들어가 정벌하면 유비가 필시 유표를 설득해 허도를 기습할 것입니다. 만에 하나 변고가 생기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오직 곽가(郭嘉)만이 유표는 필시 유비를 신임하지 못하리라 헤아려, 공에게 원정하도록 권했다. 
 
여름 5월, 무종(無終-유주 우북평군 무종현)에 이르렀다. 
 
가을 7월, 큰 홍수가 나서 바다에 면한 길(해안길)이 통하지 않았는데, 전주(田疇)가 향도(鄕導-길 안내자)가 되기를 청하자 공이 이를 따랐다. 군을 이끌고 노룡(盧龍)의 새(요새)를 나오니 요새 밖의 길이 끊어져 통하지 않았다. 

이에 산을 파고 계곡을 메우며 500여 리를 가서 백단(白檀)을 거치고 평강(平岡)을 지나 선비정(鮮卑庭-선비족의 앞뜰, 영역이란 말로, 오환선비동이전에 의하면 당시 오원, 운중에서 동쪽으로 요수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선비정이라 부름)을 건너고 동쪽으로 유성(柳城)으로 향했다. (유성에 도착하기) 2백리 전에 적들이 이를 알아챘다. 원상, 원희는 답돈(蹋頓), 요서 선우 누반(樓班), 우북평 선우 능신저지(能臣抵之) 등과 함께 수만 기를 이끌고 맞섰다. 

8월, 백랑산(白狼山)에 올랐다가 졸지에 적과 조우했는데 그 무리들이 매우 많았다. 공의 거중(車重-치중)은 후방에 있고 갑옷을 입은 자는 적으니 좌우가 모두 두려워했다. 공이 높은 곳에 올라 적의 진지가 정돈되지 못한 것을 보고는 이에 군사를 풀어 공격하며 장료(張遼)를 선봉으로 세웠다.

적군이 크게 붕괴되니 답돈과 명왕(名王-이름난 오환족 왕들) 이하를 참수하고, 투항한 호인(胡人), 한인(漢人)이 20여 만 명에 이르렀다. 요동 선우 속복환(速僕丸)과 요서, 우북평의 여러 호족들은 그 종인(種人-종족)들을 버리고 원상, 원희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났는데, 그 무리들이 수천 기에 이르렀다. 

 
당초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다.
공이 오환을 격파하자 어떤 이가 공을 설득하기를, 끝까지 정벌하면 원상 형제를 사로잡을 수 있다고 했다. 공이 말했다, 
 
“나는 바야흐로 공손강이 원상, 원희를 참수해 그 수급을 보내오게 할 것이니 군사들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소.” 
 
9월, 공이 군을 이끌고 유성으로부터 돌아오자  공손강이 원상, 원희와 속복환 등을 참수해 수급을 보내왔다.
 
 
11월, 역수(易水)에 이르자 대군(代郡) 오환의 행(行-대행의 의미) 선우 보부로(普富盧)와 상군(上郡) 오환의 대행 선우 나루(那樓)가 그들의 명왕(名王)을 거느리고 와서 축하하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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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원소가 공이 순우경을 공격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장자(長子)인 원담(袁譚)에게 말하길, 
 
“저들이 순우경 등을 공격하니, 나는 저들의 본영을 공격해 함락시켜 돌아갈 곳이 없도록 만들겠다!”
 
고 하고는, 장합(張郃), 고람(高覽)에게 조홍을 공격하게 했다. 장합 등은 순우경이 격파되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투항했다. 원소군이 크게 무너져 내리니 원소와 원담은 군을 버리고 황하를 건너 달아났다. 이를 추격했으나 미치지 못했고, 원소군의 치중(군수품)과 도서(圖書), 진보(珍寶-진귀한 보물)들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군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공이 원소의 서신을 거두었는데, 허도와 군중(군대내) 사람들의 서신을 얻자(조조군 내부인사와 원소와의 편지) 이를 모두 불태웠다

기주(冀州)의 여러 군(郡)들 중 성읍(城邑)을 들어 항복한 곳이 많았다.
 
당초 환제(桓帝) 때 황성(黃星)이 초(楚), 송(宋) 자리에서 보인 일이 있는데, 요동(遼東)의 은규(殷逵)가 천문에 밝아 이르길, ‘50년 뒤에 진인(眞人)이 있어 양(梁), 패(沛)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고 그 예봉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 했었다. (그로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대략 50년이 흘러, 공이 원소를 격파하니 천하에 이를 대적할 자가 없었다.
 
6년(201년) 여름 4월, 황하 일대에서 군세를 떨치고, 창정(倉亭)에 있던 원소군을 쳐서 깨뜨렸다. 원소는 돌아가 흩어진 병사들을 다시 거두고 반기를 든 여러 군현들을 공격해 평정했다.
 
9월, 공이 허도로 돌아왔다. 원소가 격파되기 전 원소는 유비를 보내 여남을 공략하게 했었는데, 여남의 산적 공도(共都) 등이 이에 호응했다. 채양(蔡揚)을 보내 공도를 공격했으나 불리했고 공도에게 격파 당했다. 공이 남쪽으로 유비를 정벌했다. 유비는 공이 친히 온다는 것을 듣고 유표에게로 달아났고 공도 등은 모두 흩어졌다.
 
7년(202년) 봄 정월, 공이 초(譙-조조의 고향인 패국 초현)에 주둔하며 영을 내렸다 (※군초령 軍譙令)
 
- 내가 의병(義兵)을 일으켜 천하를 위해 폭란(暴亂)을 제거했으나, 옛 땅의 인민(人民)들은 거의 다 죽거나 다쳐 국(國) 안을 온종일 다녀봐도 아는 얼굴을 만나지 못했으니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로다. 의병을 일으킨 이래 장사(將士-장졸)들 중에 후사가 끊어진 자는 그 친척들을 찾아 후사를 잇게 하고 땅과 밭을 주고 관(官)에서는 농사에 쓸 소를 공급하고 학사(學師-학관, 교사)를 두어 그들을 가르쳐라. 살아남은자를 위해서는 묘(廟-사당)를 세워주어 그 선인(先人)에게 제사지낼 수 있게 하라. 혼령이 있다면 우리 백년 뒤에라도 어찌 한스러워하겠는가!
 
그리고 준의(浚儀-진류군 준의현)로 가서 수양거(수양 운하?)를 수리하고, 사자를 보내 태뢰(太牢-모든 희생을 갖추어 쓰는 정중한 제사)로써 교현(橋玄)에게 제사지내도록 했다.
그리고 공은 진군하여 관도에 주둔했다.
 
원소는 군이 격파된 이후로 병을 얻어 피를 토하다 여름 5월에 죽었다. 작은 아들 원상(袁尙)이 직위를 대신했고, 원담(袁譚)은 거기장군을 자칭하며 여양(黎陽)에 주둔했다.
 
가을 9월, 공이 이를 정벌해 연달아 싸웠다. 원담, 원상이 여러 번 패하자 물러나 굳게 지켰다.
 
8년(203년) 봄 3월, 그 외성(郭)을 공격하자 (원담 등이) 출전했으나 이를 대파하니 원담, 원상은 밤중에 달아났다.
 
여름 4월, 업으로 진군했다.
 
5월, 허도로 돌아오며 가신(賈信)을 남겨 여양에 주둔하게 했다.
 
기유일, 영을 내렸다 (※ 패군령 敗軍令 or 엄패군령 嚴敗軍令)
 
- 사마법에서 ‘장군이 퇴각하면 사형에 처한다.’(將軍死綏)고 했으니 이 때문에 조괄(趙括)의 모친은 조괄의 죄로 자신에게 벌하지 않기를 빌었다

이는 옛 장수들은 군이 밖에서 패하면 안에서 그 집안이 죄를 받았다는 말이다. 장수들에게 정벌한 명한 이래 다만 공(功)에 대해 상을 내릴 뿐 죄를 벌하지 않았으니 이는 국법에 맞지 않는다 . 출정을 명받은 제장들로, 패군(敗軍)한 자는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 것이고 국가에 손실을 만든 자는 관작(관직과 작위가)이 면탈될 것이다

가을 7월, 영을 내렸다 (※ 건학령建學令 or 수학령脩學令)
 
- 상란(喪亂-전란) 이래 15년이 흘러 뒤에 태어난 자는 인의예양(仁義禮讓)의 기풍을 보지 못했으니 내가 이에 심히 상심하는 바이다. 이에 군국(郡國)에 영을 내리는 바, 각각 문학(文學)을 닦고 5백 호 이상의 현에는 교관(校官)을 두고 그 향(鄕)의 준조(俊造-준재)를 뽑아 교학(敎學)하도록 하라. 선왕(先王)의 도를 없어지지 않는다면 천하에 이로움이 있으리라.
 
8월, 공이 유표(劉表)를 정벌하여 서평(西平-예주 여남군 서평현)에 주둔했다. 공이 업을 떠나 남쪽으로 가자 원담과 원상이 서로 기주(冀州)를 다투었는데, 원담은 원상에게 패해 달아나 평원(平原)을 보전했다. 원상의 공격이 급해지자 원담은 신비(辛毗)를 보내 항복하고 구원을 청했다. 제장들이 모두 이를 의심했으나 순유(荀攸)가 권하니 공이 이를 허락했다. 이에 공이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여양(黎陽)에 이르러 아들 조정(曹整)과 원담의 딸을 결혼시켰다

원상은 공이 북쪽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평원의 포위를 풀고 업으로 돌아갔다. 동평(東平)의 여광(呂曠), 여상(呂翔)이 원상에 반기를 들어 양평(陽平-연주 동군 양평현)에 주둔했는데, 그 무리들을 이끌고 투항해오자 열후로 봉했다.

9년(204년) 봄 정월, 황하를 건너고, 기수(淇水)를 막아 백구(白溝)로 들어가게 해 양도(糧道-군량수송로)를 통하게 했다.
 
2월, 원상이 다시 원담을 공격하며 소유(蘇由), 심배(審配)를 남겨 업(鄴)을 지키게 했다. 공이 진군해 원수(洹水-강이름)에 당도하자 소유는 항복했다. 도착한 후 업을 공격했는데 토산과 땅굴을 만들었다. 무안장(武安長-위군 무안현의 현장) 윤해(尹楷)가 모성(毛城)에 주둔하며 상당(上黨-병주 상당군)으로 양도(군량수송로)가 통하게 했다.
 4월, 조홍(曹洪)을 남겨 업을 공격하게 하고, 공은 친히 군을 이끌고 윤해를 공격해 깨뜨린 후 돌아왔다. 원상의 장수 저곡(沮鵠)이 한단(邯鄲-기주 조국趙國 한단현)을 수비하니 또한 이를 공격해 무너뜨렸다. 
 
역양령(易陽令-조국 역양현의 현령) 한범(韓範)과 섭장(섭현의 장) 양기(梁岐)가 현을 바치고 항복하니 이들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5월, 토산과 땅굴을 허물어버리고, 성을 둘러싸는 참호를 파고 장수(漳水)를 터뜨려 성 내로 끌어들이니, 성 중에 굶어 죽는 자가 절반을 넘었다.
 
가을 7월, 원상이 돌아와 업을 구원하러오자 조조의 제장들이 모두 이르길, 
 
“이들은 본거지로 군사들이 모두 스스로 싸우고자 하니 피하는 것이 낫습니다.”
 
고 했다. 공이 말했다, 
 
“원상이 큰 길을 따라 온다면 응당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서쪽 산을 따라 온다면 사로잡을 수 있다” 
 
원상이 과연 서쪽 산을 따라 와서 부수(滏水) 가까이에 둔영을 세웠다
 
원상은 밤중에 군사를 보내 포위망을 침범하자 공이 역격(역으로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마침내 그 둔영을 포위했다. 어울려 싸우기 전에 원상이 두려워하여 전 예주자사 음기(陰夔)와 진림(陳琳)을 보내 항복을 청했다. 공이 이를 허락치 않고 포위를 더욱 급하게 했다. 원상은 밤중에 달아나 기산(祁山)을 보전했고 공이 이를 추격했다. 원상의 장수 마연(馬延), 장의(張顗) 등이 (공의) 진(陳)으로 와서 항복하자 원상군이 크게 허물어졌고 원상은 중산(中山-기주 중산국)으로 달아났다. 원상의 군수품을 모두 노획하고 원상의 인수(관직을 나타내는 관인에 비단으로 만든 수인을 묶는 끈,색깔로 계급을 구분), 절월(직권의 상징물)을 얻어 원상으로부터 항복한 자들을 시켜 그의 집안사람들에게 보여주자 성안의 사람들이 무너지고 기가 꺾이었다.
 
8월, 심배의 형 심영(審榮)이 자신이 수비하던 성의 동문(東門)을 열어 군사들을 안으로 들였다. 심배가 맞서 싸웠으나 패했다. 심배를 사로잡아 참수하고 업을 평정했다. 공이 원소의 묘에 임해 제사를 지내고 곡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원소의 처를 위로하고 그 가인(家人)들과 보물을 되돌려 보내고, 각종 비단과 솜을 내리고 관에서 양식을 공급하도록 했다
 
처음에 원소가 공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을 때 원소가 공에게 물은 적이 있다. 
 
“만약 일이 순조롭지 못하면 어느곳을 근거지로 할만 하겠소?” 
 
공이 말했다, 
 
“족하(명문가 소속의 사람을 부르는 말)의 뜻은 어떠하오?” 
 
원소가 말했다, 
 
“나는 남쪽으로 황하를 점거하고 북쪽으로 연(燕), 대(代)에 의지해 융적(戎狄)과 세력을 합치고 남쪽을 향해 천하를 다툴 것이니 이리하면 대략 성공할 것이오.” 
 
공이 말했다, 
 
“나는 천하의 지모와 역량의 인재를 써서 왕도(道)로써 이를 제어할 것이니 어느 방면이든 가능하오.”
 
9월, 영을 내렸다, 
 
“하북은 원씨의 난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니 올해 조부(조세)를 내지 말도록 하라.” 
 
호강(豪强-권세가)들이 겸병(남의 토지를 가지는것)하는 것에 관한 법을 엄중히 하자 백성들이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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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원소는 공손찬을 병합하여 4개 주를 차지하고 군사는 10여 만으로, 장차 진군하여 허도를 공격하려 했다. 제장들이 원소를 대적할 수 없다고 하자 공이 말했다, 
“나는 원소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소. 뜻은 크나 지략이 부족하고 겉으로 사나운 척 하나 담력이 약하오. 질투심이 많고 각박해 위엄이 적고, 병사는 많으나 적절히 지위하지 못하고, 장수들은 교만하여 일관성이 있지 않소. 비록 토지가 광대하고 양식이 풍족하나 오히려 우리에게 바치게 될 것이오.” 
가을 8월, 공이 여양(黎陽)으로 진군하여, 장패 등에게 청주로 들어가 제(齊), 북해(北海), 동안(東安)을 격파하게 하고 우금을 남겨 황하 가에 주둔시켰다.
9월, 공이 허도로 돌아오면서 군을 나누어 관도(官渡)를 지키게 했다
겨울 11월, 장수(張繡)가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자 열후에 봉했다.
 
12월, 공이 관도에 주둔했다.
 
원술은 진(陳) 에서 패한 이후로 점차 곤궁해지자 원담(袁譚)이 청주(靑州)에서 사람을 보내 그를 맞이하려했다. 원술이 하비를 통해 북쪽으로 가려 하자 공이 유비(劉備), 주령(朱靈)을 보내 이를 요격하게 했다. 때마침 원술이 병으로 죽었다. 정욱, 곽가가 공(公)이 유비를 보냈다는 말을 듣고 공에게 말했다, “유비를 놓아 보내서는 안 됩니다” 이에 공이 후회하고 추격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유비는 동쪽으로 가기 전에 은밀히 동승(董承) 등과 함께 모반했었는데 하비에 도착하자 마침내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죽이고 거병(擧兵)해 패(沛)에 주둔했다. 유대(劉岱), 왕충(王忠)을 보내 이를 공격케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여강(廬江)태수 유훈(劉勳)이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자 열후로 봉했다.
5년(200년) 봄 정월, 동승(董承) 등의 모의가 누설되어 모두 복주(伏誅-형벌을 받아 주살됨)되었다. 
 
공이 장차 친히 동쪽으로 유비를 치려 하자 제장들이 모두 말했다, “공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원소입니다. 지금 원소가 바야흐로 쳐들어오려 하는데 이를 내버려두고 동쪽으로 가시려 하니, 원소가 이를 틈타 우리 배후를 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공이 말했다, “무릇 유비는 인걸(人傑)이니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필시 후환이 될 것이오.
원소는 비록 뜻은 크지만 사세를 살피는 일에 더디니 필시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 
 
곽가 또한 공에게 권하자 마침내 동쪽으로 유비를 쳐서 깨뜨리고 유비의 장수 하후박(夏侯博)을 사로잡았다. 
유비는 원소에게로 달아났고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유비의 장수 관우는 하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다시 진격하여 공격하니 관우가 투항했다. 창희(昌豨)도 유비 편에 서서 모반했었으므로 또한 이를 격파했다. 공이 관도(官渡)로 돌아왔고, 원소는 끝내 출병하지 않았다.
 
2월, 원소는 곽도(郭圖), 순우경(淳于瓊), 안량(顔良)을 보내 백마(白馬)에서 동군태수 유연(劉延)을 공격하고, 원소 자신은 군을 이끌고 여양(黎陽)에 도착해 장차 황하를 건너려 했다.
 
여름 4월, 공이 북쪽으로 가서 유연을 구원했다. 순유(荀攸)가 공을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군사가 적어 대적할 수 없으므로 적의 세력이 분산되도록 해야 합니다. 공께서 연진(延津)에 도착해 장차 황하를 건너 원소군의 배후로 향하는 것처럼 하면 원소는 필시 서쪽으로 가서 이에 대응할 것입니다. 그 연후에 경병(輕兵-경무장병)으로 백마(白馬)를 기습하여 엄기불비(掩其不備-적이 방비하지 못한 곳을 엄습함)하면 가히 안량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공이 이 말에 따랐다.  
원소는 (공의) 군사들이 도하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즉시 군사를 나누어 서쪽으로 가서 이에 대응하게 했다. 그러자 공은 군을 이끌고 급히 진군하여 백마로 나아갔다. 10여 리 떨어진 곳에 채 이르지 않았을 때 안량이 크게 놀라 (군을 이끌고) 와서 맞서 싸웠다. 장료(張遼), 관우(關羽)를 선봉에 세워 이를 격파하고 안량을 참수했다. 마침내 백마에 대한 포위를 풀고 그 백성들을 황하를 따라 서쪽으로 옮겼다. 
 
이에 원소는 황하를 건너 공의 군대를 추격하여 연진(延津) 남쪽에 이르렀다. 공은 군을 이끌고 남쪽 둑 아래에 주둔하고 군사를 시켜 망루에 올라 살펴보게 하니 ‘가히 5-6백기는 된다.’고 보고했다. 얼마 후 다시 ‘기병은 점점 많아지고 보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공이 말하길, “다시 보고하지 마라”고 하고는 기병들에게 영을 내려 말안장을 벗기고 말을 풀어놓게 했다. 이때 백마에서 육로를 통해 군수품이 옮겨가고 있었다. 제장들은 적의 기병이 많으니 돌아가 둔영을 보전하는 게 낫다고 하였다. 순유가 말했다, 
 
“이는 적을 유인하려는 것인데 어찌 되돌아간다는 말이오!” 
 
원소의 기장(騎將) 문추(文醜)는 유비와 함께 5-6천 기를 이끌고 앞뒤로 이르렀다. 제장들이 다시 말하길, 
 
“말에 올라야 합니다.”
 
고 하자 공은 
 
“아직 아니오.”
 
라 했다. 얼마 후 기병이 점차 많아지고 혹 나뉘어져 군수품으로 향했다. 공이 말했다, 
 
“이제 되었소.” 
 
이에 모두 말에 올라탔다. 이때 기병이 6백을 채우지 못했으나 마침내 군사를 풀어 공격하여 원소군을 대파하고 문추를 참수했다. 안량, 문추는 원소의 명장이었으나 두 번 싸워 모두 죽임을 당하니 원소군이 크게 진동했다. 

공은 관도(官渡)로 돌아와 주둔하고, 원소는 진군해 양무(陽武-하남군 양무현)를 지켰다. 관우가 달아나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8월, 원소가 둔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해 모래언덕에 의지해 둔영(군영)을 세웠는데 동서로 수 십리에 이르렀다. 공 또한 둔영을 나누어 서로 대치하고 합전(合戰-맞붙어 싸움)했으나 불리했다

이때 공의 군사는 만 명을 채우지 못하고 부상당한 자가 열에 둘, 셋이었다.(이거 너무 병력없다고 구라같음)

원소가 다시 진격해 관도(官渡)에 임하여 토산(土山)을 세우고 땅굴을 팠다. 공 또한 안에서 이를 만들어 서로 대응했다. 원소가 둔영 안으로 활을 쏘니 화살이 마치 비처럼 쏟아져, 다닐 때는 모두 방패를 덮어써야 했고 군사들은 크게 두려워했다. 
 
이때 공의 군량이 적어 순욱(荀彧)에게 서신을 보내 허도로 돌아가는 일을 의논했다. 순욱이 말했다, 
 
“원소는 모든 군을 관도에 집결시켜 공과 더불어 승패를 결정하고자 합니다. 공은 매우 적은 병력으로 매우 많은 병력을 감당해야 하는데, 만약 이를 능히 제압하지 못한다면 필시 저들이 이를 틈탈 것이니 이는 천하를 가름하는 관건입니다. 게다가 원소는 포의지웅(布衣之雄-평범한 사내)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 일에는 능하나 그들을 제대로 쓰지는 못합니다. 무릇 공께서는 신무명철(뛰어난 무용과 밝은 지혜)을 지니고 천자의 이름으로 토벌한다면,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공이 이 말에 따랐다.
손책은 공(公)이 원소와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허도를 기습할 것을 모의했으나, 출발하기 전에 자객에게 죽임을 당했다.
여남의 항복한 적 유벽(劉辟) 등이 모반하여 원소에 호응하고 허도 주변을 공략했다. 원소가 유비를 도내 유벽을 돕게 하자 공이 조인(曹仁)을 보내 이를 격파했다. 유비는 달아났고 마침내 유벽의 둔영을 깨뜨렸다. 
 
원소의 군량운반 수레 수천 승이 도착하자 공(公) 은 순유(荀攸)의 계책을 써서 서황(徐晃), 사환(史渙)을 보내 이를 요격해 대파하고 수레를 모두 불태웠다. 공이 원소와 서로 대치한 지 여러 달이 되어 비록 전투를 치루고 적장을 베었으나 군사는 적고 군량은 소진되어 사졸들이 피폐해졌다. 공이 군량을 운반하는 자들에게 말했다, 
 
“보름 안에 너희들을 위해 원소를 격파할 것이니 다시는 너희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겠다.” 
 
겨울 10월, 원소가 수레를 보내 곡식을 운반하며 순우경(淳于瓊) 등 5명에게 군사 만여 명을 이끌고 가 이를 호송하게 하니 원소의 둔영 북쪽 40리 되는 곳에서 숙영했다. 원소의 모신(謀臣)인 허유(許攸)가 재물을 탐내었으나 원소가 이를 능히 충족해주지 못하자, 달아나 공에게로 와서 순우경 등을 공격하도록 설득했다. 좌우에서 이를 의심했으나 순유(荀攸), 가후(賈詡)는 공에게 (이를 따르도록) 권했다. 이에 공은 조홍(曹洪)을 남겨 수비하게 하고는 친히 보기 5천을 이끌고 밤중에 길을 떠나 날이 밝을 무렵 도착했다. 
 
순우경 등은 공의 군사가 적은 것을 멀리서 보고 진문(陳門) 밖으로 출진했다. 공이 급히 들이치니 순우경은 물러나 둔영을 지켰고, 다시 이를 공격했다. 원소는 기병을 보내 순우경을 구원하게 했다. 좌우에서 어떤 이가 말했다, 
 
“적 기병이 점점 접근하니 군사를 나누어 맞서십시오.” 
공이 분노하며 말했다, 
 
“적이 등 뒤까지 오거든 그때 말하라!” 
 
사졸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순우경 등을 대파하고 모두 참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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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술이 회남(淮南)에서 칭제(稱帝)하려 하며 사람을 보내 여포에게 고했다. 여포가 사자를 붙잡고 그 서신을 (조정에) 올렸다. 원술이 노하여 여포를 공격했으나 여포에게 격파되었다. 
가을 9월, 원술이 진(陳-예주 진국)을 침략하자 공이 동쪽으로 가서 정벌했다. 원술이 공이 친히 온다는 것을 듣고 군(軍)을 버리고 달아나며 그의 장수인 교유(橋蕤), 이풍(李豊), 양강(梁綱), 악취(樂就)를 남겼다. 공이 도착하여 교유 등을 격파하고 모두 참수했다. 원술이 달아나 회수를 건넜다. 공이 허도로 돌아왔다.
공이 무음(舞陰)에서 돌아온 후 남양(南陽), 장릉(章陵)의 여러 현들이 다시 모반하여 장수(張繡)에게 붙자 공이 조홍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으나 불리했다. 돌아와 섭현(葉)에 주둔했는데 여러 차례 장수와 유표의 침공을 받았다. 
겨울 11월, 공이 친히 남쪽으로 정벌하여 완에 도착했다.  유표의 장수 등제(鄧濟)가 호양(湖陽-남양군 호양현)을 점거하니 이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등제를 사로잡자 호양이 항복했다. 무음(舞陰)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3년(198년) 봄 정월, 공이 허도로 돌아와 처음으로 군사좨주(군사관련 책략두는곳?)를 두었다. 

 3월, 공이 양(穰-남양군 양현)에서 장수(張繡)를 포위했다. 
 
여름 5월, 유표가 군사를 보내 장수를 구원하며 군(軍)의 배후를 끊고자 했다.
 
공이 군을 이끌고 퇴각하려 하는데 장수의 군사들이 추격해 와 공의 군이 전진할 수 없자 둔영(군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했다. 공이 순욱(荀彧)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적이 와서 우리 군을 추격해 와 비록 하루에 몇 리 밖에 행군하지 못하지만 내가 헤아려 보건대 안중(安衆-남양군 안중현)에 도착하면 반드시 장수(張繡)를 격파할 수 있소.”
 
안중(安衆)에 도착하자 장수가 유표의 군사와 합쳐 험지를 지키니 공의 군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공은 밤중에 험지를 뚫어 땅굴을 만들고 치중(군수품)을 모두 지나게 한 후 기병(奇兵)을 두었다. 날이 밝자 적은 공이 달아났다고 여겨 전군이 추격해왔다. 이에 기병(奇兵)을 풀고 보기(步騎)로 협공하여 적을 대파했다. 
 
가을 7월, 공이 허도로 돌아왔다. 순욱이 공에게 물었다,

“이전에 적을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공이 말했다, 
 
“적이 귀사(歸師-퇴각하는 군사)인 우리 군을 막아서서 사지(死地)에서 맞붙어 싸우니, 이로써 나는 우리가 반드시 승리할 줄 알았소.”
 
여포가 다시 원술을 위해 고순(高順)을 시켜 유비를 공격하게 했다. 공이 하후돈(夏侯惇)을 보내 유비를 구원하게 했으나 불리했고, 유비는 고순에게 패했다. 
 
9월, 공이 동쪽으로 여포를 정벌했다. 
 
겨울 10월, 팽성(彭城-서주 팽성국)을 함락하고 팽성상(相) 후해(侯諧)를 사로잡았다. 진격하여 하비(下邳)에 이르니 여포가 친히 기병을 이끌고 역격(역으로 공격)했다. 이를 대파하고 여포의 효장(驍將-맹장)인 성렴(成廉)을 사로잡았다. 추격하여 성 아래에 도달하자 여포가 두려워하며 항복하고자 했다. 진궁(陳宮) 등이 이를 막으며 원술에게 구원을 청하고 여포가 출전하도록 권하니, 출전하여 싸웠으나 또 패했다. 이에 성으로 돌아가 굳게 지키니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때 공이 연달아 싸워 사졸들이 피폐해졌으므로 돌아가려 하다가, 순유(荀攸)와 곽가(郭嘉)의 계책의 써서 사수(泗水)와 기수(沂水)의 물을 성에 끌어들였다. 한 달이 지나 여포의 장수 송헌(宋憲), 위속(魏續) 등이 진궁을 붙잡고 성을 들어 항복하니, 여포, 진궁을 사로잡아 모두 죽였다. 
 
태산의 장패(臧霸), 손관(孫觀), 오돈(吳敦), 윤례(尹禮), 창희(昌豨)가 각각 무리들을 모으고 있었는데, 여포가 유비를 격파하자 장패 등이 모두 여포를 귀속되었다. 여포를 꺾고 장패 등을 사로잡자 공이 후하게 대접했는데, 마침내 청주(靑州), 서주(徐州)의 2주에서 바다에 가까운 곳을 맡기고 낭야(瑯邪), 동해(東海), 북해(北海)를 나누어 성양군(城陽郡), 이성군(利城郡), 창려군(昌慮郡)을 설치했다.
예전에 공이 연주목이 되었을 때 동평(東平)의 필심(畢諶)을 별가(別駕)로 삼았었는데, 장막이 모반하여 필심의 모친과 동생, 처자를 겁박했다. 공이 사례하며 그를 보내면서 말했다, 
“경의 노모가 저쪽에 있으니 가도 좋소.” 
필심이 머리를 조아리며 두 마음을 품지 않는다 하니 공이 이를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떠난 후 돌아오지 않았다. 여포가 격파되자 필심을 사로잡았는데 뭇 사람들이 필심에 대해 걱정하자 공이 말했다, 
“무릇 친자(親者-부모)에게 효도하는 자가 어찌 또한 군주에 충성하지 않겠는가! 내가 구하는 바다” 
이에 (필심을) 노상(魯相-예주 노국의 상)으로 삼았다

4년(199년) 봄 2월, 공(公)이 환군해 창읍(昌邑-연주 산양군 창읍현)에 이르렀다. 장양(張楊)의 장수 양추(楊醜)가 장양을 죽이자 수고(眭固)가 양추를 죽이고는 그 무리들을 이끌고 원소에 붙어 사견(射犬-하내군 야왕현 일대)에 주둔했다.

여름 4월, 진군하여 황하에 임하고, 사환(史渙), 조인(曹仁)에게 황하를 건너 수고를 공격하도록 했다. 수고는 장양의 옛 장사였던 설홍(薛洪), 하내태수 무상(繆尙)을 남겨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원소를 영접하며 구원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사환, 조인과 견성(犬城)에서 서로 만나 교전하니 수고군을 대파하고 수고를 참수했다. 마침내 공(公)이 황하를 건너 사견(射犬)을 포위했다. 설홍, 무상이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자 열후에 봉하고 오창(敖倉)으로 환군했다. 위충(魏种)을 하내태수로 삼아 하북(河北)의 일을 맡겼다.
 
예전에 공이 위충(魏种)을 효렴으로 천거했었는데, 연주(兗州)가 모반하자 공이 말했다, 
 
“오직 위충 만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위충이 달아났다는 말을 듣고 공이 노하여 말했다, 
 
“위충이 남쪽으로 월(越)로 달아나지 않고 북쪽으로 호(胡)로 달아나지않는 이상 너를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사견(射犬)을 함락시킨 후 위충을 사로잡자 공이 말했다, 
 
“오로지 너의 재능을 아낄 뿐이다!“ 
 
이에 묶인 것을 풀어주고 그를 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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