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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원소가 공이 순우경을 공격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장자(長子)인 원담(袁譚)에게 말하길, 
 
“저들이 순우경 등을 공격하니, 나는 저들의 본영을 공격해 함락시켜 돌아갈 곳이 없도록 만들겠다!”
 
고 하고는, 장합(張郃), 고람(高覽)에게 조홍을 공격하게 했다. 장합 등은 순우경이 격파되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투항했다. 원소군이 크게 무너져 내리니 원소와 원담은 군을 버리고 황하를 건너 달아났다. 이를 추격했으나 미치지 못했고, 원소군의 치중(군수품)과 도서(圖書), 진보(珍寶-진귀한 보물)들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군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공이 원소의 서신을 거두었는데, 허도와 군중(군대내) 사람들의 서신을 얻자(조조군 내부인사와 원소와의 편지) 이를 모두 불태웠다

기주(冀州)의 여러 군(郡)들 중 성읍(城邑)을 들어 항복한 곳이 많았다.
 
당초 환제(桓帝) 때 황성(黃星)이 초(楚), 송(宋) 자리에서 보인 일이 있는데, 요동(遼東)의 은규(殷逵)가 천문에 밝아 이르길, ‘50년 뒤에 진인(眞人)이 있어 양(梁), 패(沛)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고 그 예봉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 했었다. (그로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대략 50년이 흘러, 공이 원소를 격파하니 천하에 이를 대적할 자가 없었다.
 
6년(201년) 여름 4월, 황하 일대에서 군세를 떨치고, 창정(倉亭)에 있던 원소군을 쳐서 깨뜨렸다. 원소는 돌아가 흩어진 병사들을 다시 거두고 반기를 든 여러 군현들을 공격해 평정했다.
 
9월, 공이 허도로 돌아왔다. 원소가 격파되기 전 원소는 유비를 보내 여남을 공략하게 했었는데, 여남의 산적 공도(共都) 등이 이에 호응했다. 채양(蔡揚)을 보내 공도를 공격했으나 불리했고 공도에게 격파 당했다. 공이 남쪽으로 유비를 정벌했다. 유비는 공이 친히 온다는 것을 듣고 유표에게로 달아났고 공도 등은 모두 흩어졌다.
 
7년(202년) 봄 정월, 공이 초(譙-조조의 고향인 패국 초현)에 주둔하며 영을 내렸다 (※군초령 軍譙令)
 
- 내가 의병(義兵)을 일으켜 천하를 위해 폭란(暴亂)을 제거했으나, 옛 땅의 인민(人民)들은 거의 다 죽거나 다쳐 국(國) 안을 온종일 다녀봐도 아는 얼굴을 만나지 못했으니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로다. 의병을 일으킨 이래 장사(將士-장졸)들 중에 후사가 끊어진 자는 그 친척들을 찾아 후사를 잇게 하고 땅과 밭을 주고 관(官)에서는 농사에 쓸 소를 공급하고 학사(學師-학관, 교사)를 두어 그들을 가르쳐라. 살아남은자를 위해서는 묘(廟-사당)를 세워주어 그 선인(先人)에게 제사지낼 수 있게 하라. 혼령이 있다면 우리 백년 뒤에라도 어찌 한스러워하겠는가!
 
그리고 준의(浚儀-진류군 준의현)로 가서 수양거(수양 운하?)를 수리하고, 사자를 보내 태뢰(太牢-모든 희생을 갖추어 쓰는 정중한 제사)로써 교현(橋玄)에게 제사지내도록 했다.
그리고 공은 진군하여 관도에 주둔했다.
 
원소는 군이 격파된 이후로 병을 얻어 피를 토하다 여름 5월에 죽었다. 작은 아들 원상(袁尙)이 직위를 대신했고, 원담(袁譚)은 거기장군을 자칭하며 여양(黎陽)에 주둔했다.
 
가을 9월, 공이 이를 정벌해 연달아 싸웠다. 원담, 원상이 여러 번 패하자 물러나 굳게 지켰다.
 
8년(203년) 봄 3월, 그 외성(郭)을 공격하자 (원담 등이) 출전했으나 이를 대파하니 원담, 원상은 밤중에 달아났다.
 
여름 4월, 업으로 진군했다.
 
5월, 허도로 돌아오며 가신(賈信)을 남겨 여양에 주둔하게 했다.
 
기유일, 영을 내렸다 (※ 패군령 敗軍令 or 엄패군령 嚴敗軍令)
 
- 사마법에서 ‘장군이 퇴각하면 사형에 처한다.’(將軍死綏)고 했으니 이 때문에 조괄(趙括)의 모친은 조괄의 죄로 자신에게 벌하지 않기를 빌었다

이는 옛 장수들은 군이 밖에서 패하면 안에서 그 집안이 죄를 받았다는 말이다. 장수들에게 정벌한 명한 이래 다만 공(功)에 대해 상을 내릴 뿐 죄를 벌하지 않았으니 이는 국법에 맞지 않는다 . 출정을 명받은 제장들로, 패군(敗軍)한 자는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 것이고 국가에 손실을 만든 자는 관작(관직과 작위가)이 면탈될 것이다

가을 7월, 영을 내렸다 (※ 건학령建學令 or 수학령脩學令)
 
- 상란(喪亂-전란) 이래 15년이 흘러 뒤에 태어난 자는 인의예양(仁義禮讓)의 기풍을 보지 못했으니 내가 이에 심히 상심하는 바이다. 이에 군국(郡國)에 영을 내리는 바, 각각 문학(文學)을 닦고 5백 호 이상의 현에는 교관(校官)을 두고 그 향(鄕)의 준조(俊造-준재)를 뽑아 교학(敎學)하도록 하라. 선왕(先王)의 도를 없어지지 않는다면 천하에 이로움이 있으리라.
 
8월, 공이 유표(劉表)를 정벌하여 서평(西平-예주 여남군 서평현)에 주둔했다. 공이 업을 떠나 남쪽으로 가자 원담과 원상이 서로 기주(冀州)를 다투었는데, 원담은 원상에게 패해 달아나 평원(平原)을 보전했다. 원상의 공격이 급해지자 원담은 신비(辛毗)를 보내 항복하고 구원을 청했다. 제장들이 모두 이를 의심했으나 순유(荀攸)가 권하니 공이 이를 허락했다. 이에 공이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여양(黎陽)에 이르러 아들 조정(曹整)과 원담의 딸을 결혼시켰다

원상은 공이 북쪽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평원의 포위를 풀고 업으로 돌아갔다. 동평(東平)의 여광(呂曠), 여상(呂翔)이 원상에 반기를 들어 양평(陽平-연주 동군 양평현)에 주둔했는데, 그 무리들을 이끌고 투항해오자 열후로 봉했다.

9년(204년) 봄 정월, 황하를 건너고, 기수(淇水)를 막아 백구(白溝)로 들어가게 해 양도(糧道-군량수송로)를 통하게 했다.
 
2월, 원상이 다시 원담을 공격하며 소유(蘇由), 심배(審配)를 남겨 업(鄴)을 지키게 했다. 공이 진군해 원수(洹水-강이름)에 당도하자 소유는 항복했다. 도착한 후 업을 공격했는데 토산과 땅굴을 만들었다. 무안장(武安長-위군 무안현의 현장) 윤해(尹楷)가 모성(毛城)에 주둔하며 상당(上黨-병주 상당군)으로 양도(군량수송로)가 통하게 했다.
 4월, 조홍(曹洪)을 남겨 업을 공격하게 하고, 공은 친히 군을 이끌고 윤해를 공격해 깨뜨린 후 돌아왔다. 원상의 장수 저곡(沮鵠)이 한단(邯鄲-기주 조국趙國 한단현)을 수비하니 또한 이를 공격해 무너뜨렸다. 
 
역양령(易陽令-조국 역양현의 현령) 한범(韓範)과 섭장(섭현의 장) 양기(梁岐)가 현을 바치고 항복하니 이들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5월, 토산과 땅굴을 허물어버리고, 성을 둘러싸는 참호를 파고 장수(漳水)를 터뜨려 성 내로 끌어들이니, 성 중에 굶어 죽는 자가 절반을 넘었다.
 
가을 7월, 원상이 돌아와 업을 구원하러오자 조조의 제장들이 모두 이르길, 
 
“이들은 본거지로 군사들이 모두 스스로 싸우고자 하니 피하는 것이 낫습니다.”
 
고 했다. 공이 말했다, 
 
“원상이 큰 길을 따라 온다면 응당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서쪽 산을 따라 온다면 사로잡을 수 있다” 
 
원상이 과연 서쪽 산을 따라 와서 부수(滏水) 가까이에 둔영을 세웠다
 
원상은 밤중에 군사를 보내 포위망을 침범하자 공이 역격(역으로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마침내 그 둔영을 포위했다. 어울려 싸우기 전에 원상이 두려워하여 전 예주자사 음기(陰夔)와 진림(陳琳)을 보내 항복을 청했다. 공이 이를 허락치 않고 포위를 더욱 급하게 했다. 원상은 밤중에 달아나 기산(祁山)을 보전했고 공이 이를 추격했다. 원상의 장수 마연(馬延), 장의(張顗) 등이 (공의) 진(陳)으로 와서 항복하자 원상군이 크게 허물어졌고 원상은 중산(中山-기주 중산국)으로 달아났다. 원상의 군수품을 모두 노획하고 원상의 인수(관직을 나타내는 관인에 비단으로 만든 수인을 묶는 끈,색깔로 계급을 구분), 절월(직권의 상징물)을 얻어 원상으로부터 항복한 자들을 시켜 그의 집안사람들에게 보여주자 성안의 사람들이 무너지고 기가 꺾이었다.
 
8월, 심배의 형 심영(審榮)이 자신이 수비하던 성의 동문(東門)을 열어 군사들을 안으로 들였다. 심배가 맞서 싸웠으나 패했다. 심배를 사로잡아 참수하고 업을 평정했다. 공이 원소의 묘에 임해 제사를 지내고 곡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원소의 처를 위로하고 그 가인(家人)들과 보물을 되돌려 보내고, 각종 비단과 솜을 내리고 관에서 양식을 공급하도록 했다
 
처음에 원소가 공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을 때 원소가 공에게 물은 적이 있다. 
 
“만약 일이 순조롭지 못하면 어느곳을 근거지로 할만 하겠소?” 
 
공이 말했다, 
 
“족하(명문가 소속의 사람을 부르는 말)의 뜻은 어떠하오?” 
 
원소가 말했다, 
 
“나는 남쪽으로 황하를 점거하고 북쪽으로 연(燕), 대(代)에 의지해 융적(戎狄)과 세력을 합치고 남쪽을 향해 천하를 다툴 것이니 이리하면 대략 성공할 것이오.” 
 
공이 말했다, 
 
“나는 천하의 지모와 역량의 인재를 써서 왕도(道)로써 이를 제어할 것이니 어느 방면이든 가능하오.”
 
9월, 영을 내렸다, 
 
“하북은 원씨의 난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니 올해 조부(조세)를 내지 말도록 하라.” 
 
호강(豪强-권세가)들이 겸병(남의 토지를 가지는것)하는 것에 관한 법을 엄중히 하자 백성들이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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