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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술이 회남(淮南)에서 칭제(稱帝)하려 하며 사람을 보내 여포에게 고했다. 여포가 사자를 붙잡고 그 서신을 (조정에) 올렸다. 원술이 노하여 여포를 공격했으나 여포에게 격파되었다. 
가을 9월, 원술이 진(陳-예주 진국)을 침략하자 공이 동쪽으로 가서 정벌했다. 원술이 공이 친히 온다는 것을 듣고 군(軍)을 버리고 달아나며 그의 장수인 교유(橋蕤), 이풍(李豊), 양강(梁綱), 악취(樂就)를 남겼다. 공이 도착하여 교유 등을 격파하고 모두 참수했다. 원술이 달아나 회수를 건넜다. 공이 허도로 돌아왔다.
공이 무음(舞陰)에서 돌아온 후 남양(南陽), 장릉(章陵)의 여러 현들이 다시 모반하여 장수(張繡)에게 붙자 공이 조홍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으나 불리했다. 돌아와 섭현(葉)에 주둔했는데 여러 차례 장수와 유표의 침공을 받았다. 
겨울 11월, 공이 친히 남쪽으로 정벌하여 완에 도착했다.  유표의 장수 등제(鄧濟)가 호양(湖陽-남양군 호양현)을 점거하니 이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등제를 사로잡자 호양이 항복했다. 무음(舞陰)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3년(198년) 봄 정월, 공이 허도로 돌아와 처음으로 군사좨주(군사관련 책략두는곳?)를 두었다. 

 3월, 공이 양(穰-남양군 양현)에서 장수(張繡)를 포위했다. 
 
여름 5월, 유표가 군사를 보내 장수를 구원하며 군(軍)의 배후를 끊고자 했다.
 
공이 군을 이끌고 퇴각하려 하는데 장수의 군사들이 추격해 와 공의 군이 전진할 수 없자 둔영(군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했다. 공이 순욱(荀彧)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적이 와서 우리 군을 추격해 와 비록 하루에 몇 리 밖에 행군하지 못하지만 내가 헤아려 보건대 안중(安衆-남양군 안중현)에 도착하면 반드시 장수(張繡)를 격파할 수 있소.”
 
안중(安衆)에 도착하자 장수가 유표의 군사와 합쳐 험지를 지키니 공의 군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공은 밤중에 험지를 뚫어 땅굴을 만들고 치중(군수품)을 모두 지나게 한 후 기병(奇兵)을 두었다. 날이 밝자 적은 공이 달아났다고 여겨 전군이 추격해왔다. 이에 기병(奇兵)을 풀고 보기(步騎)로 협공하여 적을 대파했다. 
 
가을 7월, 공이 허도로 돌아왔다. 순욱이 공에게 물었다,

“이전에 적을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공이 말했다, 
 
“적이 귀사(歸師-퇴각하는 군사)인 우리 군을 막아서서 사지(死地)에서 맞붙어 싸우니, 이로써 나는 우리가 반드시 승리할 줄 알았소.”
 
여포가 다시 원술을 위해 고순(高順)을 시켜 유비를 공격하게 했다. 공이 하후돈(夏侯惇)을 보내 유비를 구원하게 했으나 불리했고, 유비는 고순에게 패했다. 
 
9월, 공이 동쪽으로 여포를 정벌했다. 
 
겨울 10월, 팽성(彭城-서주 팽성국)을 함락하고 팽성상(相) 후해(侯諧)를 사로잡았다. 진격하여 하비(下邳)에 이르니 여포가 친히 기병을 이끌고 역격(역으로 공격)했다. 이를 대파하고 여포의 효장(驍將-맹장)인 성렴(成廉)을 사로잡았다. 추격하여 성 아래에 도달하자 여포가 두려워하며 항복하고자 했다. 진궁(陳宮) 등이 이를 막으며 원술에게 구원을 청하고 여포가 출전하도록 권하니, 출전하여 싸웠으나 또 패했다. 이에 성으로 돌아가 굳게 지키니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때 공이 연달아 싸워 사졸들이 피폐해졌으므로 돌아가려 하다가, 순유(荀攸)와 곽가(郭嘉)의 계책의 써서 사수(泗水)와 기수(沂水)의 물을 성에 끌어들였다. 한 달이 지나 여포의 장수 송헌(宋憲), 위속(魏續) 등이 진궁을 붙잡고 성을 들어 항복하니, 여포, 진궁을 사로잡아 모두 죽였다. 
 
태산의 장패(臧霸), 손관(孫觀), 오돈(吳敦), 윤례(尹禮), 창희(昌豨)가 각각 무리들을 모으고 있었는데, 여포가 유비를 격파하자 장패 등이 모두 여포를 귀속되었다. 여포를 꺾고 장패 등을 사로잡자 공이 후하게 대접했는데, 마침내 청주(靑州), 서주(徐州)의 2주에서 바다에 가까운 곳을 맡기고 낭야(瑯邪), 동해(東海), 북해(北海)를 나누어 성양군(城陽郡), 이성군(利城郡), 창려군(昌慮郡)을 설치했다.
예전에 공이 연주목이 되었을 때 동평(東平)의 필심(畢諶)을 별가(別駕)로 삼았었는데, 장막이 모반하여 필심의 모친과 동생, 처자를 겁박했다. 공이 사례하며 그를 보내면서 말했다, 
“경의 노모가 저쪽에 있으니 가도 좋소.” 
필심이 머리를 조아리며 두 마음을 품지 않는다 하니 공이 이를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떠난 후 돌아오지 않았다. 여포가 격파되자 필심을 사로잡았는데 뭇 사람들이 필심에 대해 걱정하자 공이 말했다, 
“무릇 친자(親者-부모)에게 효도하는 자가 어찌 또한 군주에 충성하지 않겠는가! 내가 구하는 바다” 
이에 (필심을) 노상(魯相-예주 노국의 상)으로 삼았다

4년(199년) 봄 2월, 공(公)이 환군해 창읍(昌邑-연주 산양군 창읍현)에 이르렀다. 장양(張楊)의 장수 양추(楊醜)가 장양을 죽이자 수고(眭固)가 양추를 죽이고는 그 무리들을 이끌고 원소에 붙어 사견(射犬-하내군 야왕현 일대)에 주둔했다.

여름 4월, 진군하여 황하에 임하고, 사환(史渙), 조인(曹仁)에게 황하를 건너 수고를 공격하도록 했다. 수고는 장양의 옛 장사였던 설홍(薛洪), 하내태수 무상(繆尙)을 남겨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원소를 영접하며 구원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사환, 조인과 견성(犬城)에서 서로 만나 교전하니 수고군을 대파하고 수고를 참수했다. 마침내 공(公)이 황하를 건너 사견(射犬)을 포위했다. 설홍, 무상이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자 열후에 봉하고 오창(敖倉)으로 환군했다. 위충(魏种)을 하내태수로 삼아 하북(河北)의 일을 맡겼다.
 
예전에 공이 위충(魏种)을 효렴으로 천거했었는데, 연주(兗州)가 모반하자 공이 말했다, 
 
“오직 위충 만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위충이 달아났다는 말을 듣고 공이 노하여 말했다, 
 
“위충이 남쪽으로 월(越)로 달아나지 않고 북쪽으로 호(胡)로 달아나지않는 이상 너를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사견(射犬)을 함락시킨 후 위충을 사로잡자 공이 말했다, 
 
“오로지 너의 재능을 아낄 뿐이다!“ 
 
이에 묶인 것을 풀어주고 그를 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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