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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년 봄 정월, 후장군(사방장군중에 하나로 3품정도의 고급장군 그리고 후방을 담당하는 역활) 원술, 기주목 한복, 예주자사 공주, 연주자사 유대, 하내태수 , 발해태수 원소, 진류태수 장막, 동군태수 교모, 산양태수 원유, 제북상(제북 태수) 포신이 동시에 함께 군사를 일으켰는데 그 무리가 각각 수 만에 이르렀고 원소를 추대해 맹주로 삼았다. 조조는 분무장군(잡호장군 중에 하나 큰 의미가 없다 4품) 직을 대행했다.

2월, 동탁은 (원소 등이) 군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황제를 옮겨 장안에 도읍했다. 
동탁은 낙양에 남아 주둔하며 궁실을 불태웠다. 이때 원소는 하내(河內)에, 장막, 유대, 교모, 원유는 산조(酸棗-진류군 산조현)에, 원술은 남양(南陽-형주 남양군)에, 공주는 영천(潁川-예주 영천군)에 주둔하고 있었고 한복은 업(鄴-기주 위군 업현)에 있었다. 동탁군이 강하여 원소 등은 감히 앞장서서 진군하지 못했다. 
 

 

태조(조조)가 말했다, 

“의병을 일으킨 것은 폭란(暴亂)을 징벌하고자 한 것이오. 대군이 이미 모였는데 제군들은 무엇을 주저하시오?  만약 동탁이 산동병(태산쪽)이 봉기했다는 것을 듣고 조정의 권위에 의지하고 이주(二周-서주와 동주; 장안과 낙양)의 험고함에 기대어 군사를 동쪽으로 보내어 천하를 지배하려했다면 , 비록 무도(無道)하게 이를 행했다 하더라도 족히 근심거리가 되었을 것이오.

(그러나) 이제 궁실을 불태우고 천자를 겁박해 수도를 옮겨 해내(海內-천하)가 진동하여 돌아갈 곳을 모르니 (무슨말인지 모르겠음- 동탁의 천도는 민심과 정통성이 연합군으로 향한다는 뜻인듯?)이는 하늘이 그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오. 한 번의 싸움으로 천하를 평정할 수 있으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되오

그리고는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장차 성고(成皐-하남군 성고현)를 점거하려 했다. 장막이 장수 위자(衛茲)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어 태조를 뒤따르게 했다. 

형양(滎陽-하남군 형양현)의 변수(汴水-황하의 지류)에 도착해 동탁의 장수 서영(徐榮)과 조우하여 싸웠으나 불리(不利)하여, 죽거나 다친 사졸들이 매우 많았다. 태조는 날아온 화살에 맞았고 타고 있던 말이 상처를 입었는데, 종제(사촌동생)인 조홍(曹洪)이 태조에게 말을 주어 밤중에 달아날 수 있었다. 서영은 태조가 이끄는 군사가 적은데도 온종일 역전(力戰-힘써 싸움)하는 것을 보고 산조(酸棗 진류군 산조현)는 쉽게 공략할 수 없다고 여겨 또한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태조가 산조(酸棗)에 도착했는데, 여러 군의 군사가 10여 만에 이르렀으나 날마다 술을 내어 성대한 주연을 베풀며 진격하려 하지 않았다. 태조가 이를 질책하며 계책을 제시했다, 
 

“제군(諸君)들은 내 계책을 들어보시오. 발해(勃海-발해태수 원소)는 하내의 군사를 이끌고 맹진(孟津)에 임하게 하고, 산조(酸棗)의 제장들은 성고(成皐)를 지키며 오창(敖倉-형양 북서쪽에 있던 양식저장창고)을 점거하고 환원(轘轅), 태곡(太谷)을 틀어막아 험요지 전부를 제압하며(※환원, 태곡은 낙양 남동쪽의 요충지), 원장군(후장군 원술)은 남양의 군사를 이끌고 단(丹-남양군 단수丹水현), 석(析-남양군 석현)에 주둔하여 무관(武關)으로 들어가게 해 삼보(三輔-장안 일대)를 뒤흔드는 것이오. 

 

모두 보루를 높이고 벽을 깊게 파 더불어 싸우지 않으며, 의병의 숫자를 늘려 천하에 형세를 과시하며 정의로써 역적을 토벌한다면 천하는 어렵지않게 평정될수 있을것이요. 지금 군사가 의(義)로 일어났으나 의심을 품은 채 진격하지 않아 천하의 바람을 저버리고 있으니 삼가 생각컨대 제군들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야 하오.” 

장막 등은 이 계책을 쓸 수 없었다.
 태조의 군사가 적었으므로 하후돈(夏侯惇) 등과 함께 양주(揚州)로 가서 모병하니 (양주)자사 진온(陳溫), 단양태수 주흔(周昕)이 군사 4천여 명을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용항(龍亢-예주 패국 용항현)에 당도하자 사졸들이 다수 모반했다. 질(銍-패국 질현), 건평(建平-패국 건평현)에 이르러 다시 군사 천여 명을 모으고 진군하여 하내에 주둔했다.
 

유대와 교모가 서로 미워하여 유대가 교모를 죽이고, 왕굉(王肱)으로 하여금 동군태수를 겸하게 했다.

 원소는 한복과 함께 유주목 유우(劉虞)를 황제로 세우려고 모의했는데 태조는 이를 거절했다. 
 
또한 원소가 일찍이 옥인(玉印-옥쇄) 하나를 얻었는데 태조와 함께 앉아 있는 자리에서 팔꿈치를 향해 들어 보였다.
이 때문에 태조가 그를 비웃고 미워했다. 
 
(191년) 봄, 원소와 한복이 마침내 유우를 황제로 세우려 했으나 유우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름 4월, 동탁이 장안으로 돌아왔다.
 
가을 7월, 원소가 한복을 위협해 기주를 차지했다. 
 
흑산적 우독(于毒), 백요(白繞), 수고(眭固;휴고) 등 10여 만 무리가 위군(魏郡-기주 위군), 동군(東郡-연주 동군)을 침략했다. 왕굉(王肱)이 이를 막지 못하자 태조가 군을 이끌고 동군(東郡)으로 들어가 복양(濮陽-동군 복양현)에서 백요를 격파했다. 이에 원소가 표를 올려 태조를 동군태수로 삼으니 동무양(東武陽-동군 동무양현)을 다스리도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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