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208년) 봄 정월, 공이 업으로 돌아와, 현무지(玄武池)를 만들어 주사(舟師-수군)를 조련했다
한(漢)나라에서 삼공(사마,사도,태위의 최고위 정책 결정)의 관직을 폐지하고 승상(내정 총책임), 어사대부(감찰과 법,문서 담당 - 승상이 문제가 있을때 승상대리)를 두었는데, 여름 6월, 공을 승상으로 임명했다
가을 7월, 공이 남쪽으로 유표(劉表)를 정벌했다.
8월, 유표가 죽자 그 아들인 유종(劉代)이 대신해 양양에 주둔하고, 유비는 번(樊-양양성 북쪽의 한수 북쪽 연안)에 주둔했다.
9월, 공이 신야(新野-형주 남양군 신야현)에 이르자 유종은 항복하고 유비는 하구(夏口-한수가 장강으로 유입되는 입구)로 달아났다. 공이 강릉(江陵-형주 남군 강릉현)으로 진군하고, 형주의 관원과 백성들에 하령해 경시(更始-고쳐서 다시 시작함)하도록 했다.
이 에 형주를 복종시킨 공을 논해 15명을 후(侯)로 봉하고, 유표의 대장인 문빙(文聘)을 강하(江夏)태수로 삼아 본래 군사들을 통솔하게 하고, 형주의 명사(名士)인 한숭(韓嵩), 등의(鄧義) 등을 발탁해서 임용했다.
익주목 유장(劉璋)이 처음으로 징역(徵役-징발)을 받아들여, 군사들을 보내서 군에 공급했다.
12월, 손권이 유비를 위해 합비(合肥-양주 구강군 합비현)를 공격했다. 공이 강릉에서부터 유비를 정벌하여 파구(巴丘)에 이르렀고, 장희(張喜)를 보내 합비를 구원했다. 손권은 장희가 온다는 말을 듣고 이내 달아났다.
공이 적벽(赤壁)에 이르러 유비와 더불어 싸웠는데 불리했다. 이때 큰 역병이 돌아 관원과 군사들 중 죽은 이가 많았으므로 이에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유비가 마침내 형주(荊州)와 강남(江南-장강 남쪽)의 여러 군(郡)들을 차지했다.
14년(209년) 봄 3월, 군이 초(譙)에 이르렀다. 경주(輕舟-가볍고 빠른 배)를 만들어 수군을 조련했다.
가을 7월, 와수(渦水-회수의 지류)로부터 회수(淮水)로 들어가 비수(肥水)를 빠져나와 합비에 주둔했다.
신미일(???), 영을 내렸다 (※ 존휼령 存恤令 or 존휼종군리사가실령 存恤從軍吏士家室令)
- 근래에 군이 수차례 정벌을 행하는 와중이나 혹은 역병을 만나, 관원과 군사들이 죽어 돌아오지 못해 집안에는 원망이 가득하고 백성들은 흩어져 떠도니, 어진이라면 어찌 이것이 즐겁겠는가? 부득이한 일일 뿐이다. 죽은 이들 중 집안에 기업(基業-기반이 되는 생업)이 없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가 있으면, 현(縣)의 관아에서는 양식을 대어주고 장리(長吏)들은 이들을 존휼(存恤-위문하고 구제함)하고 어루만져 내 뜻에 부합되게 하라.
양주(揚州)의 군현에 장리(長吏)를 두고 작피(芍陂)에 둔전(屯田)을 열었다.
12월, 군이 초로 돌아왔다.
15년(210년) 봄, 하령했다 (※ 구현령 求賢令)
- 예로부터 천명을 받거나 중흥(中興)한 임금 중에서 현인(賢人), 군자(君子)를 얻어 그들과 함께 천하를 다스리지 않은 자가 일찍이 있었던가? 현인을 얻고자 함에 그들이 여항(閭巷-여염집-일반백성의 집)을 나오지 않는다면 어찌 요행히 서로 만날 수 있겠는가? 윗사람이 그들을 구하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니 특히 현인을 급히 구해야 할 때이다. (논어 헌문편에서)
“맹공작(孟公綽-춘추시대 노나라 대부)은 (진晉나라의) 조(趙)씨, 위(魏)씨의 로(老-가신들의 우두머리)가 되기에는 넉넉하나, 등(滕)이나 설(薛)의 대부(大夫)를 이기기에는 부족하다”
고 했다. 만약 반드시 염사(廉士-청렴한 선비)인 연후에만 기용할 수 있다면 제환공은 어찌 패업을 이루었겠는가! 지금 천하에 갈옷을 입고 옥 같은 마음을 품은 채 위빈(渭濱)에서 낚시질하는 자가 없겠는가? (강태공 비유) 형수를 도둑질하고 금을 받고 아직 무지(無知-위무지)를 만나지 못한 자가 또한 없겠는가? (위무지에게 추천받은 진평이 누명을 써서 관영과 주발등에 비난받음 )
그대들이 나를 돕고자 한다면, 측루(仄陋-출신이 한미함)한 자라도 오직 재주가 있으면 천거하여(唯才是擧) 내가 그들을 얻어 기용할 수 있도록 하라. -
겨울, 동작대(구리로 만든 참새 건물)를 만들었다
16년(211) 봄 정월, 천자가 공의 세자인 조비(曹丕)를 오관중랑장(궁중 수비 및 단속)으로 삼고 관속(오관 중랑장 내 신하?)을 두어 승상을 돕도록 했다.
태원(太原)의 상요(商曜) 등이 대릉(大陵-병주 태원군 대릉현)에서 모반하자 하후연, 서황을 보내 이를 포위해 격파했다. 장로(張魯)가 한중을 점거하니 3월에 종요(鍾繇)를 보내 장로를 토벌했다. 공이 하후연 등에게 하동(河東)에서 나와 종요와 합류하게 했다.
이때 관중(옹주)의 제장들은 종요가 습격하고자 하는 것으로 의심하니, 마침내 마초(馬超)가 한수(韓遂), 양추(楊秋), 이감(李堪), 성의(成宜) 등과 함께 모반했다. 조인(曹仁)을 보내 이를 토벌케 했다.
마초 등은 동관(潼關)에 주둔했는데 공이 제장들에게 경계해 말하길,
“관서(關西)의 군사들이 정예하고 사나우니, 견벽(성벽을 굳게 지키고)하고 더불어 싸우지 말라.”
고 했다.
가을 7월, 공이 서쪽을 정벌하여 마초 등과 더불어 관(關)을 사이에 끼고 진을 쳤다.
공은 급박하게 대치하는 한편, 몰래 서황(徐晃), 주령(朱靈) 등을 보내 밤중에 포판진(蒲阪津)을 건너 하서(河西)를 점거해 둔영을 세우게 했다.
공이 동관에서 북쪽으로 강을 건너려 했는데 미처 건너기 전에 마초가 배를 향해 달려와 급박하게 싸웠다. 이에 교위 정비(丁斐)가 우마(牛馬)를 풀어 유인하자 적들이 우마를 취하느라 어지러워졌고 이에 공이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황하를 따라 용도(甬道-담을 양쪽에 쌓아 만든 통로)를 만들며 남쪽으로 진군했다. 적이 물러나 위구(渭口-위수가 황하로 유입되는 입구)를 지켰다. 이에 공이 의병(疑兵-속이는 군사)을 여럿 두고는, 배에 군사들을 태워 몰래 위수(渭水)로 들어가 부교(浮橋)를 만들고, 밤중에 군사를 나누어 위수 남쪽에 둔영을 세웠다. 적이 밤중에 둔영을 공격하자 복병(伏兵)으로 이를 격파했다. 마초 등은 위수 남쪽에 주둔하며 서신을 보내 황하 서쪽을 떼어줄 것을 요구하며 화해를 청했으나 공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9월, 진군하여 위수를 건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