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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 등이 여러 번 싸움을 걸었으나 또한 응하지 않았다. 할지(영토를 나눔)를 계속 청하며 자식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제안하자, 공이 가후(賈詡)의 계책을 써서 이를 거짓으로 허락했다. 
 
한수가 공과 서로 만날 것을 청했는데 공은 한수의 부친과 같은 해에 효렴이 되었고, 또한 한수와 같은 시기의 동년배였다. 이에 말(馬)을 마주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군사(軍事)에 관한 일은 말하지 않고 다만 경도(京都-수도)에서 있었던 옛 일만을 얘기하며 손뼉을 치며 환담했다. 대화를 끝낸 뒤 마초 등이 한수에게 물었다, 
 
“공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한수가 말했다, 
 
“별 말 없었소” 
 
마초 등이 이를 의심하였다
 

뒷날, 공이 또 한수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여러 곳의 글자를 첨삭해 마치 한수가 고친 것처럼 보이게 하니, 마초 등이 더욱 한수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에 공이 날짜를 정해 회전(會戰-어울려 싸움)했다. 먼저 경병(가벼운 옷차림의 병사)으로 싸움을 걸고 싸움이 매우 오래 지속된 후 호기(호랑이같은 기병)를 풀어 협격(협공)하여 대파하고 성의, 이감 등을 참수했다. 한수, 마초 등은 양주(涼州)로 도주하고 양추는 안정(安定)으로 달아나니 관중(關中)이 평정되었다. 
 
제장들 중에 어떤 이가 공에게 물었다, 
 
“당초 적이 동관을 지킬 때 위수 북쪽 길이 비어 있었는데, 하동(河東)으로부터 풍익(馮翊)을 치지 않고 도리어 동관을 지키다 시일을 끈 후에야 북쪽으로 강을 건넜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공이 말했다, 
 
“적이 동관을 지키는데 만일 내가 하동(河東)으로 들어가면 적은 필시 군을 이끌고 나루터들을 수비할 것인 즉 서쪽으로 황하를 건널 수 없었을 것이오. 나는 이 때문에 대군을 동관으로 향하게 한 것이오. 이에 적이 전군으로 남쪽을 지켜 황하 서쪽의 방비가 허술하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두 명의 장군(서황, 주령)이 서하(西河-황하 서쪽)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오. 그 뒤에 내가 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강을 건널 때 적이 우리 군과 서하(西河)를 다툴 수 없었던 것은 두 장군의 군이 있었기 때문이오. 수레를 연결하고 목책을 세워 용도(좁은 성벽으로 이루어진 작은 길 )를 만들어 남쪽으로 진군한 것은 이길 수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군이 허약함을 일부러 내보인 것이오. 
 
 
위수를 건너 보루를 견고히 한 채 적이 와도 출격하지 않아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었으니, 이에 적은 영루(진영과 보루)를 세우지도 않고 할지(割地)를 요구하게 된 것이오. 내가 순순히 이를 허락하여 그들의 뜻에 따른 이유는 스스로 안심시켜 방비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소. 이틈에 사졸들의 힘을 축적해 하루아침에 들이치니 소위 ‘질풍 같은 천둥소리에는 미처 귀를 가리지 못한다’(질뢰불급엄이)는 것이오. 전쟁의 변화(變化)에는 오로지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은 아니오.” 
 
당초, 매번 적의 한 부(부대)가 도착할 때마다 공은 희색을 띄었었다. 적을 격파한 후 제장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공이 웃으며 말했다, 
 
“관중(關中)은 넓고 멀어서 만약 적들이 각각 험조한 땅에 의지했다면 이를 정벌하려 해도 1,2년 안에 평정할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모두 와서 집결해 그 무리가 비록 많다고 하더라도 서로 귀복(복종)하지 못하고 군에는 마땅한 주인이 없어 일거에 멸하여 공을 세우기가 다소 쉬워졌으니 이 때문에 내가 웃었던 것이오.”
겨울 10월, 군(軍)이 장안으로부터 북쪽으로 양추(楊秋)를 정벌해 안정(安定)을 포위했다. 양추가 항복하자 그의 작위(爵位)를 되돌려주고 그를 (안정에) 남겨두어 그 백성들을 위무(위로)하도록 했다.
 

12월, 안정으로부터 환군하고, 하후연을 남겨 장안에 주둔하도록 했다.

  
17년(212) 봄 정월, 공이 업으로 돌아왔다. 천자가 공에게 찬배불명(贊拜不名-천자를 배알할 때 이름을 부르지 않음), 입조불추(入朝不趨-입조할 때 종종걸음하지 않음), 검리상전(劍履上殿-칼을 차고 신발을 신고 어전에 오름)을 명하니 소하(蕭何)의 전례와 같았다. 마초의 남은 무리인 양흥(梁興) 등이 남전(藍田-경조 남전현)에 주둔하자 하후연에게 이를 쳐서 평정하도록 했다. 
 
하내(河內)군의 탕음(蕩陰), 조가(朝歌), 임려(林慮), 동군(東郡)의 위국(衛國), 돈구(頓丘), 동무양(東武陽), 발간(發幹), 거록(鉅鹿)군의 영도(廮陶), 곡주(曲周), 남화(南和), 광평(廣平)군의 임성(任城), 조(趙)국의 양국(襄國), 한단(邯鄲), 역양(易陽)현을 떼어내 위군(업 근처 행정구역)에 덧붙였다.
 
겨울 10월, 공이 손권(孫權)을 정벌했다.
 
18년(213) 봄 정월, 유수구(濡須口)로 진군했다. 손권의 장강 서쪽 둔영을 공파(공격하여 깨뜨림)하고 손권의 도독(오나라 지방 사령관) 공손양(公孫陽)을 포획하고 이에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천자는 조서(詔書)를 내려 14주를 아울러 다시 구주(九州)를 두었다. 
 
여름 4월, 업에 이르렀다.
 
5월 병신일, 천자가 어사대부 치려(삼공중 하나로 황제의 비서)에게 절(節)을 지니고 가게 해 책명(策命)을 내려 공을 위공(위나라의 작위와 봉토,자치권)으로 삼았다. 
 
 
가을 7월, 처음으로 위(魏)나라의 사직(社稷)과 종묘(宗廟)를 세웠다. 천자가 공(公)의 세 딸을 맞아들여 귀인(후궁)으로 삼았는데, 막내딸은 국(國)에서 장성하기를 기다리도록 했다
 9월, 금호대(누각)를 만들었다. 수로를 뚫고 장수(漳水)를 끌어들여 백구(白溝)로 들어가게 해 황하와 통하게 했다. 
겨울 10월 위군(魏郡)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고 도위(아마 치안을 위한 행정구역)를 두었다. 

 

11월, 처음으로 상서(기밀처리 기구), 시중(왕의 고문), 육경(낭중령,태복,대리,대농,집금오,소부)을 두었다

 

마초가 한양(천수)에서 다시 강족, 호인에 의지해 난을 일으키자 저왕(氐王) 천만(千萬)이 모반하고 마초에 호응해 흥국(興國)에 주둔했다. 하후연을 시켜 이를 토벌하게 했다. 

 
19년(214) 봄 정월, 처음으로 적전(왕의 농사 짓는 시범용 토지)을 갈았다. 남안(南安)의 조구(趙衢)와 한양(漢陽=천수)의 윤봉(尹奉) 등이 마초를 토벌해 그 처자(妻子)를 효수했고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다. 
 
한수(韓遂)는 금성(金城)으로 옮겨 저왕(氐王) 천만(千萬)의 부(부락)로 들어갔는데, 강족과 호인 1만여 기를 이끌고 하후연과 싸웠다. 하후연이 이를 대파하자 한수는 서평(西平)으로 달아났다. 하후연이 제장들과 더불어 흥국(저족의 나라)을 공격해 함락했다. 안동군(安東郡), 영양군(永陽郡)을 없앴다.
 
안정태수 관구흥(毌丘興)이 장차 임지(임무를 위해 배정받은 곳)로 나아가려 할 때 공이 경계하여 말했다, 
 
“강(羌-강족), 호(胡-흉노)가 중국과 교통하고자 하면 마땅히 스스로 사람을 보내야 할 것이지 먼저 보내면 아니되오. 착한 사람은 얻기 힘든 법이니, 선량하지 않은 사람은 필시 장차 강, 호를 시켜 중국에게 지나친 요구하게 하고 이를 틈타 스스로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오. 이런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풍속이 다른 저들의 마음을 잃게 되고, 따른다 하더라도 이익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오.”  
 
관구흥이 도착하여 교위 범릉(範陵)을 강(羌)으로 들여보냈는데 과연 범릉이 강(羌)으로 하여금 자신을 속국도위(屬國都尉)로 삼아주도록 요구하게 했다. 공이 말했다, 
 
“응당 그러리라는 것을 내가 미리 안 것은 성인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런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오.” 
 
 

3월, 천자가 위공(魏公)을 제후왕(제후들 중의 왕)의 위에 두게 하고, 다시 금새(金璽-금으로 된 도장), 적불(赤紱-붉은 인끈), 원유관(遠遊冠)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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