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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關羽)는 자(字)가 운장(雲長)이고 본래 자(字)는 장생(長生)이며 하동(河東)군 해(解)현 사람이다. 망명하여 탁군(涿郡-유주 탁군)으로 달아났다. 선주(先主-유비)가 향리(鄕里-태어난 마을에서)에서 도중(徒衆-무리)을 모으니 관우는 장비(張飛)와 함께 그를 위해 적을 막아냈다.

 

 

 

선주가 평원상(平原相)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 장군수하 하급무관)로 삼고 부곡(部曲 - 사병)을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선주는 두 사람과 함께 잠자며 같은 침상을 썼고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종일토록 선주(유비) 옆에 있었고 , 선주를 따라 떠돌아다니며 고난과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선주는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습격해 죽이고, 관우에게 하비성(下邳城)을 지키며 태수의 일을 행하도록 하고(行太守事)  자신은 소패(小沛)로 돌아갔다.

건안 5년(200), 조공(曹公-조조)이 동쪽을 치자 선주는 원소(袁紹)에게로 달아났다. 조공은 관우를 사로잡고 돌아와 편장군(偏將軍 낮은 직위의 장군)에 임명하고 매우 두텁게 예우했다.  

원소가 대장(大將) 안량(顔良)을 보내 동군(東郡)태수 유연(劉延)을 백마(白馬)에서 공격하자, 조공은 장료(張遼)와 관우를 선봉(先鋒)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병거에 달린 대장기 덮개)를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해서 달려가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刺) 그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제장(諸將 여러 장수)들 중 당해 낼 자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조공(曹公)이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했다.
 
당초 조공은 관우의 사람됨을 크게 여겼으나 그의 심신(心神-마음)에 오래 머물 뜻이 없음을 살피고는 장료에게 이르길

“경이 시험 삼아 그의 뜻을 물어보시오”

라고 했다. 그 뒤 장료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조공께서 후히 대우 해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유장군(劉將軍-좌장군 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이를 저버릴 수는 없소. 나는 여기 끝까지 머물 수는 없으나 반드시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한 뒤에 떠날 것이오.” 
 
장료가 관우의 말을 조공에게 보고하니 조공이 이를 의롭게 여겼다.
 
관우가 안량을 죽이게 되자 조공은 관우가 필시 떠날 것임을 알고 포상을 더욱 무겁게 베풀었다. 관우는 하사받은 것을 모두 봉해 놓고 작별을 고하는 서신을 올린 후 원소군에 있던 선주(先主)에게로 달아났다. 좌우(左右)에서 이를 추격하려 하자 조공이 말했다, 
 
“그는 각기 자신의 주인을 위한 것이니 뒤쫓지 말라.
 
선주(先主)를 따라 유표(劉表)에게로 나아갔다. 유표가 죽고 조공이 형주(荊州)를 평정하니, 선주는 번(樊)성으로부터 장차 남쪽으로 가 장강을 건너려 하며, 따로 관우를 보내 수백 척의 배를 타고 가게 해 강릉(劉表)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공이 추격하여 당양(當陽) 장판(長阪)에 이르렀고, 선주는 한진(漢津)으로 가다가 때마침 관우의 배와 서로 만나게 되어 함께 하구(夏口)에 도착했다.

손권이 군대를 보내 선주를 도와 조공을 막았고 조공이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선주는 강남(江南-장강 남쪽)의 여러 군을 거두어들이고는 으뜸 되는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관직를 주었으며 관우를 양양(襄陽)태수 탕구장군(盪寇將軍-잡호장군 중 하나 )으로 삼아 강북(江北-장강 북쪽)에 주둔하게 했다. 선주가 서쪽으로 익주(益州)를 평정할 때 관우를 동독형주사(董督荊州事-형주의 사무를 지휘 감독)로 임명했다. 

관우는 마초(馬超)가 항복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예전부터 친분, 내왕이 있는 이가 아니기에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사람됨과 재주가 누구에 비교될 수 있는지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의 호승심이 강함을 알았으므로 이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맹기(孟起-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웅렬(雄烈-굳세고 맹렬함)이 남보다 뛰어난 일세의 호걸로 경포(黥布), 팽월(彭越)과 같은 무리입니다. 응당 익덕(益德-장비)과 말머리를 나란히 해 달리며 선두를 다툴 수는 있으나 염(髥-수염) 그대의 절륜(絶倫) 일군(群羣-출중함)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관우는 수염이 아름다웠으니 이 때문에 제갈량이 관우를 일컬어 염(髥)이라 한 것이다. 관우는 이 서신을 읽어보고 크게 기뻐하며 빈객(賓客)들에게 보여주었다.
 
일찍이 관우는 화살에 맞아 왼팔을 관통 당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비록 상처는 치유되었으나 몹시 흐리며 비오는 날이면 늘 뼈가 아팠다. 의원이 말했다, 
 
“화살촉에 독이 있어 이 독이 뼈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응당 팔을 갈라 상처를 내고 뼈를 깎아 내 독을 제거해야 하니 그 연후에야 이 통증이 없어질 것입니다.” 
 
관우는 이내 팔을 뻗어 의원에게 자신의 팔을 가르게 했다. 이때 관우는 때마침 제장들을 청하여 음식을 먹으며 함께 하고 있었는데, 팔에서 피가 흘러 반기(盤器-대야, 접시)에 가득 찼으나 관우는 구운 고기를 자르고 술잔을 끌어당겨 담소를 나누며 태연자약했다. 
 
건안 24년(219년), 선주(先主)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관우를 전장군(前將軍-사방장군 중 하나 선봉을 주로 맡음), 가절과 월(假節 鉞)을 주었다
이 해, 관우가 군사를 이끌고 번(樊)에서 조인(曹仁)을 공격했다. 조공이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을 돕게 했다. 가을, 큰 비가 내려 한수(漢水)가 범람하고 우금이 이끌던 7군(七軍)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했고, 관우는 또 장군 방덕(龐德)을 참수했다. 양(梁-사례 하남윤 양현), 겹(郟-영천군 겹현) 육혼(陸渾-홍농군 육혼현)의 군도(群盜-뭇 도적)들이 혹 멀리서 관우의 인호(印號-관인과 봉호)를 받아 그의 일당이 되었고 관우의 위세가 화하(華夏-중국)를 진동했다. 
조공이 허도(許都)를 옮겨 그 예봉을 피할 것을 의논했는데,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과 장제(蔣濟)가 말하길, ‘관우가 뜻을 이루는 것을 손권이 필시 원하지 않을 것이니 가히 사람을 보내 손권이 그 배후를 치도록 권할 만합니다. 강남(江南)을 떼어내어 손권을 봉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번(樊)의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라 했고 조공이 이에 따랐다. 
그 이전에 손권이 사자를 보내 자신의 아들을 위해 관우의 딸을 청한 일이 있는데, 관우가 그 사자를 모욕하며 혼인을 허락지 않으니 손권이 대노했었다

또 남군태수 미방(麋芳)이 강릉(江陵)에 있고 장군 사인(士仁)이 공안(公安)에 주둔했는데 (※) 그들 모두는 관우가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것에 평소 원한을 품었었다.

관우가 출군한 이래 미방, 사인은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그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자 관우가 ‘돌아가면 응당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했다. 이에 손권이 은밀히 미방과 사인을 꾀자 미방과 사인은 사람을 시켜 손권을 영접했다. 
 
한편, 조공은 서황을 보내 조인을 구원했고
관우가 이를 이기지 못하자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거하고 관우 사중(士衆-사졸)들의 처자를 모두 사로잡자 관우군이 마침내 흩어졌다.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역격(逆擊)하고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關平)을 임저(臨沮-형주 남군 임저현)에서 참(斬)했다.

관우에게 시호를 추증해 장무후(壯繆侯)라 했다.

 아들 관흥(關興)이 후사를 이었다

평한다.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세의 호신(虎臣-범 같은 신하)이었다. 관우는 조공(曹公)에게 보효(報效-힘써 보답함)하고 장비는 의(義)로써 엄안(嚴顔)을 놓아주었으니 아울러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관우는 강이자긍(剛而自矜-굳세고 자부심이 강함)하고 장비는 폭이무은(暴而無恩-난폭하고 은혜롭지 않음)하여 자신의 단점으로써 패망하게 되었으니 이수(理數-도리,이치)의 상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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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흥 3년(225년) 봄, 제갈량이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고  그해 가을에 모두 평정했다.

군자(軍資-군수물자)가 이곳에서 나오니 나라가 부유하고 넉넉해졌다. 군대를 정비하고 , 훈련하며 크게 군사를 일으킬 때를 기다렸다.

건흥 5년(227년), 제군(率諸)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한중(漢中)에 주둔했다. 출병에 즈음하여 상소(上疏)했다

- “선제(先帝-이전 황제 즉 유비)께서 창업한 후 반도 이루시기 전에 중도에 붕조(崩殂-붕어)하시고,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뉘고 익주는 피폐했으니 이는 실로 위급(危急), 존망(存亡)의 때입니다. 그러나 가깝게지내는 신하가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런 장수가 밖에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선제의 후은을 잊지 못해 폐하께 보답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실로 성청(聖聽-임금이 귀로 듣는 것)을 널리 열어 선제께서 남긴 덕을 빛내고 지사(志士)들의 의기를 넓히셔야 하며, 함부로 스스로를 비루한 사람이라 낮추고 대의를 잃은 비유를 들어 충간(忠諫)이 들어오는 길을 막으셔서는 안 됩니다.  

 
궁중(宮中)과 부중(府中-관부)은 모두 한 몸이니 척벌장비(陟罰臧否-선행을 상주고 악행을 벌함)에 서로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간사하게 죄를 범한 자와 충성스럽고 착한 일을 한 자가 있다면 의당 유사(有司-해당 관원)에 회부해 그 형벌과 상을 논하도록 하여 폐하의 평명(平明-공명정대)한 이치를 밝혀야 하며, 사사로움에 치우쳐 안팎의 법이 서로 달라서는 안 됩니다.  
 
시중(侍中), 시랑(侍郎)인 곽유지(郭攸之), 비의(費禕), 동윤(董允) 등은 모두 선량하고 성실하며 뜻과 헤아림이 충성스럽고 깨끗하니, 이 때문에 선제께서 이들을 뽑아 쓰고 폐하께 남긴 것입니다. 생각건대 궁중의 일은 크건 작건 모두 이들에게 물으시고 그 연후에 시행하신다면 필시 부족한 점을 보충해 널리 보탬이 될 것입니다. 장군 상총(向寵)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공평하며 군사(軍事)에도 정통해 예전에 선제께서 처음 써 보시고 유능하다고 칭찬하셨고, 이 때문에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상총을 독(督 사령관)으로 삼으셨습니다. 생각건대 영중(營中)의 일은 모두 그에게 물으시면 필시 군대를 화목(和睦)하게 하고 그 우열(優劣)에 따라 사람들을 적소에 둘 것입니다. 
 
현신(賢臣)을 가까이 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한 것이 바로 선한(先漢-전한)이 흥륭(興隆-흥성)한 까닭이고, 소인을 가까이 하고 현신을 멀리한 것이 곧 후한(後漢)이 기울고 무너진 까닭입니다. 선제께서 생전에 매번 신과 더불어 이 일을 논하실 때마다, 일찍이 환제, 영제 때의 어지러움을 탄식하고 통한해 하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시중(侍中), 상서(尙書), 장사(長史), 참군(參軍)은 모두 충성스럽고 선량하며 죽음으로 절의를 지킬 신하들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이들을 가까이 하고 믿으신다면 한실의 융성은 가히 날을 헤아리며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본래 포의(布衣-무명옷; 평민)로 남양(南陽)에서 몸소 밭을 갈며 그럭저럭 난세에서 성명(性命-목숨)을 보전하려 할 뿐 제후에게 문달(聞達-이름이 알려져 등용됨)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제께서 신을 비루하다 하지 않고 외람되게도 친히 몸을 낮추시고 신의 초려(草廬)를 세 번 찾아 당세의 일을 물으시니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를 위해 구치(驅馳-분주하게 힘씀)할 것을 약속드렸습니다. 그 뒤 기울어져 뒤집히는 위험(傾覆)을 당하자 군이 패할 때 임무를 받아 위난(危難) 속에서 명을 받들었고 그 이래로(유비가 제갈량을 찾아온 이래) 21년이 지났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근신(謹愼-삼가고 조심함)함을 아시고 이 때문에 붕어하실 때 신에게 큰일을 맡기셨습니다. 명을 받은 이래 밤낮으로 근심하고 탄식하며, 부탁받은 바에 힘쓰지 못해 선제의 밝음을 상하게 될까 두려워하니, 이 때문에 5월에 노수(瀘水)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이제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병갑(兵甲-병기와 갑옷) 또한 넉넉하니 응당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해야 합니다. 노둔(駑鈍-미련하고 둔함)한 재주를 다해 간흉(姦凶)을 물리치고 한실을 부흥해 구도(舊都-옛 수도, 즉 낙양, 장안)로 돌아가려 합니다. 이것이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하는 신의 직분(職分-직책과 본분)이며, 손익(損益)을 헤아려 극력으로 충언을 올리는 것은 곽유지, 비의, 동윤의 임무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하는 일을 신에게 맡기시고, 만약 성과가 없으면 신의 죄를 다스리고 선제의 영전에 고하십시오. 만약 덕을 흥하게 하는 말이 없으면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태만함을 꾸짖어 그 허물을 분명히 드러내십시오. 또한 폐하께서는 스스로 깊이 생각하시며 바른 도리를 물으시고, 좋은 말을 살피고 받아들여 선제의 유조(遺詔)를 깊이 새겨 따르신다면, 신은 그 은혜에 감읍해 마지않겠습니다. 이제 먼 길을 떠나며 표(表)를 올리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출병하여 면양(沔陽-익주 한중군 면양현)에 주둔했다.
 
건흥 6년(228년) 봄, 야곡도(斜谷道)를 거쳐 미(郿- 우부풍 미현)를 취하려 한다고 양성(揚聲-일부러 소문냄)하고 조운, 등지를 의군(疑軍-속이는 군사)으로 삼아 기곡(箕谷)을 점거하게 하자, 위(魏)의 대장군 조진(曹眞)이 군을 이끌고 이를 막았다. 제갈량 자신은 제군(諸軍)을 이끌고 기산(祁山)을 공격했는데, 융진(戎陳-군진)이 정제(整齊-정돈되어 가지런함)되어 있고, 상벌이 엄숙하며 호령(號令)이 분명했다. 남안(南安), 천수(天水), 안정(安定) 세 군(郡)이 위(魏)를 배반하고 제갈량에 호응하니 관중(關中)이 진동했다.

위(魏) 명제(明帝)는 서쪽으로 가서 장안을 지키고 장합(張郃)에게 명하여 제갈량을 막게 했다. 제갈량은 마속(馬謖)에게 선두에서 제군(諸軍)을 이끌게 해 가정(街亭)에서 장합과 싸우게 했다.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節度-명령, 지휘통제)를 어기고 거동(擧動)이 실의(失宜-부적절함)하여 장합에게 대파 당했다. 제갈량은 서현(西縣-천수군 서현)의 천여 가(家)를 뽑아 한중으로 되돌아오고 마속을 죽여 군사들에게 사죄했다. 

상소를 올렸다, 

“신이 미약한 재주로 외람되게 과분한 자리를 차지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삼군을 독려했으나, 능히 규율을 가르치고 법을 밝히지 못해 일에 신중하지 못하여서 가정(街亭)에서는 명을 어기는(違命) 허물을 범하고, 기곡(箕谷)에서는 경계하지 못한(不戒) 실책을 범했으니, 그 허물은 모두 신이 임무를 줌에 있어 방법이 잘못된데 있습니다. 신이 명철하게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휼사(恤事-일을 고려함)에 크게 어두웠으니, [춘추]에서 통수 자를 질책한다(責帥)라 함이 바로 신의 직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청컨대, 스스로 3등(等)을 깎아 그 허물을 꾸짖게 해 주십시오.”  
 
이에 제갈량을 우장군(높은 장군에 하나로 수도 방위), 행 승상사(行丞相事)(승상의 사무를 대행)로 삼고, 총괄하는 바는 예전과 같게 했다. 
겨울, 제갈량이 다시 산관(散關)을 나와 진창(陳倉)을 포위했다. 조진이 이를 막았고 제갈량은 군량이 다하여 퇴각했다. 위(魏)의 장수 왕쌍(王雙)이 기병을 이끌고 제갈량을 추격하니 제갈량이 더불어 싸워 격파하고, 왕쌍을 참수했다.
건흥 7년(229년), 제갈량이 진식(陳式)을 보내 무도(武都), 음평(陰平)을 공격했다. 위(魏) 옹주자사 곽회(郭淮)가 군을 이끌고 진식을 공격하려 하자 제갈량이 직접 출병해 건위(建威)에 도착했고 곽회가 퇴환하니 마침내 두 군(郡)을 평정하였다.  
 
제갈량에게 조책(詔策)을 내렸다. 
 
“가정 싸움의 허물은 마속에게서 비롯된 것이나 그대는 자신의 허물로 돌려 심히 스스로 폄억(貶抑-폄하하고 억제함. 벼슬을 내림)하니, 그대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워 그 청을 들어주었다. 지난해에 왕사를 빛내 왕쌍을 참수하고 올해도 정벌하여 곽회를 둔주(遁走-도주)케 했다. 
 
저(氐), 강(羌)을 항복시켜 모으고 2군(郡)을 회복했으며, 위엄은 흉포한 무리를 제압하고 공훈은 현연(顯然)하도다. 지금 바야흐로 천하가 소란스럽고 원악(元惡-원흉. 악행의 우두머리)이 아직 효수되지 않았고 그대는 대임을 맡은 나라의 기둥이니, 오래도록 스스로 관직을 낮추고있으면  홍렬(洪烈-위대한 공업)을 크게 드날릴수가 없다. 이제 다시 그대를 승상으로 삼으니 사양치 말라.”

건흥 9년(231년), 제갈량이 다시 기산(祁山)으로 출병했다. 목우(木牛)로 운송했는데, 군량이 다 떨어져 퇴각하다 위(魏)의 장수 장합(張郃)과 교전해, 활을 쏘아 장합을 죽였다.

건흥 12년(234년) 봄, 제갈량이 대군을 모두 이끌고 야곡(斜谷)을 거쳐 출병했다. 유마(流馬)로 운송하며 무공(武功) 오장원(五丈原)을 점거하고,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과 위남(渭南)에서 대치했다. 
 
제갈량은 늘 군량이 이어지지 않아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함을 근심하였으므로 이에 군사를 나눠 둔전하고 오래도록 주둔할 기초를 만들었다. 경작하는 군사들이 위수 강변의 백성들과 섞여 지냈으나 백성들은 편안히 지내고 군에는 사사로움이 없었다.

서로 대치한 지 백여 일이 지나 그해 8월, 제갈량이 질병으로 군중에서 죽으니, 이때 나이 54세였다

군이 퇴각하자 선왕(宣王-사마의)이 그의 영루(營壘)와 처소(處所)를 둘러보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奇才)로다!”

제갈량은 한중(漢中) 정군산(定軍山)에 매장하도록 유언했는데, 산에 의지해 분묘를 만들고 무덤은 관이 들어갈 정도로만 하며, 평상복으로 염하고 기물(器物)을 쓰지 말도록 했다.  

 
조책(詔策)을 내렸다, 
 
“생각건대 그대의 체자(體資-천성, 품성)는 문무(文武)를 갖추고 명예(明叡-총명하고 지혜로움), 독성(篤誠-독실하고 성실함)하여, 탁고(託孤)의 유조를 받아 몸소 짐을 광보(匡輔-보필)하니, 끊어진 것을 잇고 쇠미한 자를 흥하게 하며 정난(靖亂-국난을 평정함)할 뜻이 있었다. 이에 육사(六師-육군. 황제의 군대)를 정돈해 정벌하지 않은 해가 없었고, 신무(神武)를 혁혁하게 빛내고 위엄을 팔황(八荒-온 천하)에 떨쳐 계한(季漢-촉한)에 큰 공을 세웠으니 이윤, 주공의 큰 공훈과 나란하도다. 
 
어찌 하늘이 보우하지 않아 대사가 거의 이루어지려 하는데 병을 만나 죽게 되었는가! 짐은 상심하고 서러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구나. 무릇 덕을 존중해 공의 순서를 세우고 행적을 기록해 시호를 명하니, 이로써 장래에 빛나게 하고 책에 기재해 불후(不朽)하게 하려 한다. 지금 사지절(使持節) 좌중랑장(左中郎將) 두경(杜瓊)을 시켜 그대에게 승상(丞相) 무향후(武鄕侯)의 인수와 충무후(忠武侯)의 시호를 내리노라. 혼령이 있으면 이 총영(寵榮-영예)에 기뻐하리라.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예전에 제갈량이 스스로 후주(後主-유선)에게 표를 올렸었다, 
 
“성도에 뽕나무 8백 그루가 있고 메마른 땅 열다섯 경(頃)이 있으니 자제들이 입고 먹기에는 스스로 넉넉합니다. 신이 밖에서 임무를 받들 때는 따로 조달할 것 없이 제 한 몸의 먹고 입는 것은 모두 관부에 의지했으므로 따로 치생(治生-생활의 방도를 차림)하여 척촌(尺寸-적은 양)을 보태지는 않았습니다. 신이 죽었을 때 안으로 여분의 비단이나 밖으로 남은 재산이 있어 폐하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죽은 뒤에 보니 그 말과 같았다. 제갈량은 성정이 교사(巧思-교묘한 구상)에 능하여 연노를 개량하고 목우, 유마가 모두 그의 생각에서 나왔다. 병법을 추연(推演-미루어 넓힘)하고 팔진도(八陳圖)를 만드니 모두 그 요체를 얻을 수 있었다.  
 
경요(景耀) 6년(263년) 봄, 조령을 내려 제갈량을 위해 면양(沔陽-한중군 면양현)에 사당(廟)을 세웠다.
 
가을, 위(魏) 진서장군(鎭西將軍) 종회(鍾會)가 촉을 정벌해 한천(漢川)에 도착하자 제갈량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군사들에 명해 제갈량의 묘 근처에서 말에게 꼴을 먹이거나 땔나무를 캐지 못하게 했다. 제갈량의 동생인 제갈균(諸葛均)은 관직이 장수교위에까지 이르렀다.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諸葛瞻)이 작위를 이었다

평한다. 제갈량은 상국(相國)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의궤(儀軌-예법의 본보기)를 보이고, 관직을 간략히 하여 권제(權制-임시 제도)에 따르고, 성심을 열어 공도(公道)를 베풀었다. 충성을 다하고 보탬이 된 자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주고, 법을 어기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한 자라도 반드시 벌주었다. 죄를 인정하고 실토한 자는 비록 중죄라도 반드시 풀어주고, 헛된 말로 교묘히 꾸미는 자는 비록 가벼운 죄라도 반드시 죽였다. 선행이 작다 하여 상주지 않는 일이 없고, 악행이 작다 하여 문책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모든 일을 정련(精練)히 하여 그 근본을 다스리고, 명분에 따라 그 실질을 책임지우며(명분과 실질이 서로 부합하게 했다는 말) 헛된 것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마침내 나라 안 모든 이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경애하고, 비록 형정(刑政)이 준엄했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그 마음 씀이 공평하며 권하고 경계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가히 다스림을 아는 빼어난 인재(識治之良才)로 관중, 소하의 아필(亞匹-버금가는 짝)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임기응변의 지략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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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諸葛亮)의 자는 공명(孔明)이고, (서주) 낭야(琅邪)군 양도(陽都)현 사람이다. 한(漢) 사례교위(수도방위 및 행정 및 감찰관) 제갈풍(諸葛豐)의 후예다. 


 
부친 제갈규(諸葛珪)는 자가 군공(君貢)이고 한(漢) 말 태산군승(太山郡丞-연주 태산군 군승-군수 보좌)을 지냈다. 제갈량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종부(從父-백부, 숙부를 통칭)인 제갈현(諸葛玄)은 원술(袁術)에 의해 예장(豫章)태수로 임명되자, 제갈량과 제갈량의 동생 제갈균(諸葛均)을 데리고 부임했다. 때마침 한나라 조정에서 다시 주호(朱皓)를 (예장태수로) 뽑아 제갈현을 대신하게 했다. 제갈현은 평소 형주목 유표(劉表)와 교분이 있었으므로 그에게로 가서 의탁했다

제갈현이 죽자 제갈량은 몸소 밭이랑에서 농사지었으며, 양보음(梁父吟)을 부르기 좋아했다.

신장 8척으로 늘 자신을 관중(管仲), 악의(樂毅)에 비교했으나 당시 사람들은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 오직 친한 벗으로 지내던 박릉(博陵-기주 박릉군)의 최주평(崔州平), 영천(潁川-예주 영천군)의 서서(徐庶) 원직(元直) 만이 참으로 그러하다고 인정했다. 

이때 선주(先主-유비)가 신야(新野-형주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서(徐庶)가 선주를 만나보자 선주가 그를 중히 여겼다. 서서가 선주에게 말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와룡(臥龍-누워있는 용)입니다. 장군께서는 그를 보고 싶으십니까?”

선주가 말했다, 
 
“군(君-그대)이 데리고 오시오.” 
 
서서가 말했다, 
 
“이 사람은 가서 만나볼 수는 있으나 몸을 굽혀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의당 몸을 낮추시고 방문하셔야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선주가 제갈량을 방문했고 세 번 만에 만날 수 있었다. 
 
선주는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말했다, 
 
“한나라 황실이 무너지고 간신이 천명을 도용하여  주상(主上)께서 모욕을 당하게 되었소. 나는 스스로의 덕과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천하에 대의를 펴고자 했으나 지술(智術-지모)이 얕고 부족해 창궐(猖蹶-실패, 좌절)하다 오늘에 이르렀소. 그러나 뜻은 여전히 버리지 않았으니, 장차 어찌 해야 할지 알려 주시겠소?” 
 제갈량이 대답했다.
동탁 이래 호걸들이 아울러 일어나 주(州)를 타넘고 군(郡)을 연결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조조는 원소에 비하면 명성은 미약하고 그 군사는 적었으나 마침내 원소를 이겨 약자에서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천시(天時) 만이 아니라 또한 인모(人謀-사람의 꾀)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조는 백만 군사를 거느린 채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호령하므로(挾天子而令諸侯) 실로 그와 역량을 다툴 수 없습니다. 손권은 강동을 점거해 차지한 지 이미 3대가 지났고, 나라는 험하며 백성들은 귀부하고 현능한 이들이 쓰이고 있으니, 가히 동맹으로 삼을지언정 도모할 수는 없습니다. 
 
형주(荊州)는 북쪽으로 한수, 면수에 의지해 그 이익이 남해(南海)에 다다르고, 동쪽으로 오회(吳會-오, 회계)와 연결되고 서쪽으로 파(巴), 촉(蜀)과 통하니 이는 용무지국(用武之國-용병할 요충지)입니다. 그러나 그 주인이 능히 지킬 수 없어, 이는 거의 하늘이 장군께 주려는 것이니 장군은 취할 뜻이 있으십니까? 
 
익주(益州)는 험색(險塞-험준하고 막혀있음)하며 옥야(沃野-기름진 들판) 천리의 천부지토(天府之土-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한 땅)로, 고조(高祖-한고조 유방)께서 이에 의지해 제업(帝業)을 이루었습니다. 유장이 암약(闇弱-어리석고 나약함)하여 장로가 북쪽을 차지하고 있는데, 민은국부(民殷國富-백성은 넉넉하고 나라는 부유함)하나 백성들을 다독일 줄 모르니 지혜롭고 재주 있는 선비들은 명군(明君) 얻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제실(帝室-황실)의 후예인데다 사해에 신의(信義)를 떨쳤으며, 영웅들을 널리 받을어 들이며 현인 그리워하는 것을 목마른 사람이 물 찾듯 하십니다. 만약 형주, 익주를 타넘어 차지해 그 엄조(巖阻-험조)함에 기대고, 서쪽으로 제융(諸戎-여러 융족들)과 화친하고 남쪽으로 이월(夷越)을 어루만지며, 밖으로는 손권과 결호(結好-화친을 맺음)하고 안으로는 정리(政理-정치)를 닦으면서, 천하에 변고가 있을 때 한명의 상장(上將)에게 명해 형주의 군사를 이끌고 완(宛), 낙(洛-낙양)으로 향하게 하고 장군께서는 몸소 익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천(秦川)으로 출병하신다면, 단사호장(簞食壺漿-대나무 그릇에 담은 밥과 호리병의 국)으로 장군을 영접하지 않을 백성이 감히 누가 있겠습니까? 실로 이처럼 한다면 가히 패업(霸業)이 이루어지고 한실(漢室)이 흥할 것입니다.”
 
선주가 말했다, 
“옳은 말씀이오!” 
이에 제갈량과의 정이 날로 깊어졌다.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유비가 다독이며 말했다,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원컨대, 제군들은 이에 관해 다시 말하지 말라.” 
이에 관우, 장비가 불평을 멈추었다.
유표의 장자 유기(劉琦) 또한 제갈량을 매우 중시했다. 유표는 후처(後妻)의 말을 받아들여 작은 아들인 유종(劉琮)을 사랑하고 유기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不悅) 유기는 매양 제갈량과 더불어 스스로 안전할 수 있는 방책(自安之術)을 꾀하려 했으나 제갈량은 번번이 이를 거절하며 더불어 처획(處畫-상의하거나 계획함)하지 않았다. 이에 유기는 제갈량을 데리고 후원을 산책하다 함께 높은 누각에 올라 연회를 베푸는 사이 사람을 시켜 사다리를 치우게 했다. 
 
그리고는 제갈량에게 말했다, “오늘은 위로는 하늘에 이르지 않고 아래로는 땅에 닿지 않으니, 말이 그대 입에서 나와 제 귀로 들어갈 뿐입니다. 말씀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제갈량이 대답했다, “그대는 신생(申生)이 안에 있다가 위험해지고 중이(重耳)가 밖에 있다가 안전해진 것을 보지 못하셨소?” (※)
 
※ 신생(申生)은 진헌공(晉獻公)의 태자로 여희(驪姬)의 참소를 받아 자살하고, 중이(重耳)는 신생의 동생으로 나라 밖으로 달아나 목숨을 건지고, 오랜 세월 방랑하다 다시 돌아와 즉위함, 춘추5패의 하나인 진문공(晉文公)이 바로 중이입니다.

유기는 깨닫는 바가 있어 밖으로 나갈 것을 은밀히 꾀했다. 때마침 황조(黃祖)가 죽자 밖으로 나가 강하(江夏)태수가 되었다.  

갑자기 유표가 죽고, 유종은 조공이 와서 정벌한다는 것을 듣고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선주는 번(樊)성에서 이 일을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왔다. 제갈량은 서서와 함께 뒤따랐는데 조공이 추격해 격파하고 서서의 모친을 붙잡았다. 서서는 선주에게 이별을 고하며,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본래 장군과 함께 왕패(王霸)의 업을 도모하려 한 것은 이 방촌지지(方寸之地-사방 1촌의 땅. 가슴을 가리킴)에서였습니다. 지금 노모를 잃어 방촌(方寸)이 어지러워 일에 도움이 될 수 없으니 이에 작별을 청합니다.” 
 
그리고는 조공에게로 갔다.

선주가 하구(夏口)에 도착하자 제갈량이 말했다, 

 
“일이 급합니다. 명을 받들어 손장군(孫將軍-손권)에게 구원을 청하도록 해 주십시오.” 
 
이때 손권은 군을 거느리고 시상(柴桑-양주 예장군 시상현)에 있으면서 싸움의 성패(成敗)를 관망하고 있었다.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했다, 
 
“해내(海內)에 대란이 일자 장군께서는 군사를 일으켜 강동을 점거해 차지하고 유예주(劉豫州-예주목 유비)께서는 또한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거두어 조조와 천하를 다투었습니다. 지금 조조는 큰 어려움을 제거하고 대략 평정을 끝냈습니다. 마침내 형주까지 격파하여 위세를 사해(四海)에 떨쳐 영웅들이 용무(用武-용병)할 곳이 없으니 이 때문에 예주께서 둔도(遁逃-도피)하여 이곳에 이른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역량을 헤아려 대처하셔야 합니다. 만약 오(吳), 월(越)의 군사로 중국(中國)과 능히 맞설 수 있다면 (중국과) 일찍 관계를 끊느니만 못합니다. 만약 능히 당해낼 수 없다면 어찌 안병속갑(案兵束甲-무기를 내버리고 갑옷을 묶어 둠. 무장해제)하고 북면(北面)하여 조조를 섬기지 않습니까! 지금 장군께서는 겉으로는 복종의 명목을 내세우며 내심으로는 망설이십니다. 일이 급한데 결단하지 못하니 머지않아 화(禍)가 닥칠 것입니다!” 
 
손권이 말했다, “그대의 말대로라면 유예주는 어찌 끝내 조조를 섬기지 않는 것이오?” 

제갈량이 말했다, “전횡(田橫)은 제나라의 장사(壯士)이나 오히려 의(義)를 지키며 모욕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유예주께서는 왕실의 후예로, 영재(英才-뛰어난 재주)가 세상을 덮어 뭇 선비들이 모앙(慕仰-앙모)하는 것이 마치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듯 하는 분이니, 만약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곧 하늘의 뜻일 뿐, 어찌 남의 아래에 들어가겠습니까!”  
손권이 발끈하며 말했다, 
 
“나는 오(吳) 땅 전부와 10만 군사를 들어 남에게 제어당할 순 없소. 내 계책은 이미 정해졌소! 유예주가 아니면 조조를 당해낼 수 없소. 그러나 예주(豫州-유비)가 이제 막 패한 직후니 이 어려움에 어찌 대처해야 하겠소?” 
 
 제갈량이 말했다, 
 
“예주(豫州-유비)의 군이 비록 장판(長阪)에서 패했으나 지금 돌아온 전사(戰士-병사)와 관우의 수군(水軍)이 정갑(精甲-정병) 만 명이고, 유기(劉琦)가 합한 강하의 전사 또한 최소한 만 명입니다. 조조의 군사는 멀리 와서 피폐해졌고, 제가 듣기로 예주(豫州-유비)를 추격해 경기(輕騎-경기병)로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왔다 하니, 이는 이른바 ‘강노(强弩-강한 활, 쇠뇌)가 끝에 이르러서는 노나라의 명주 천도 뚫을 수 없다’(强弩之末, 勢不能穿魯縞)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병법에서 이를 꺼려 ‘필히 상장군(上將軍)을 꺾이게 하다’(必蹶上將軍)고 했습니다. 
게다가 북방 사람들은 물싸움에 익숙지 않고 또한 조조에 귀부한 형주민은 병세(兵勢-군세, 병력)에 핍박당한 것이지 마음으로 복종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장군께서 실로 맹장(猛將)에 명해 수만 군사를 이끌며 예주와 협력하여 힘을 모으면 필히 조조 군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조조군 이 격파되면 틀림없이 북쪽으로 돌아갈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형(荊), 오(吳)의 세력이 강해져 정족(鼎足-솥발)의 형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패의 계기는 금일에 달려 있습니다.”  
 
손권이 크게 기뻐하며 주유(周瑜), 정보(程普), 노숙(魯肅) 등 수군 3만을 보내 제갈량을 따라 선주에게로 나아가 힘을 합해 조공에 맞서게 했다.

조공은 적벽(赤壁)에서 패하자 군을 이끌고 업(鄴)으로 돌아갔다. 선주는 마침내 강남(江南-장강 남쪽)을 거두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으로 삼아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감독하며 부세(賦稅)를 거두어 군실(軍實-군대의 무기와 양식)을 채우게 했다.

건안 16년(211년), 익주목 유장(劉璋)이 법정(法正)을 보내 선주를 영접하고 장로(張魯)를 공격하게 했다. 제갈량은 관우와 함께 형주를 진수했다. 선주가 가맹(葭萌-익주 광한군 가맹현)에서 돌아와 유장을 공격하니, 제갈량은 장비, 조운 등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군현들을 나누어 평정하고, 선주와 함께 성도를 포위했다. 

 
성도가 평정되자 제갈량을 군사장군(軍師將軍-참모장)으로 삼고 좌장군부(左將軍府-유비가 그때 좌장군)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  선주가 밖으로 출병하면 제갈량은 늘 성도를 진수하며 식량과 병사를 대었다. 
 
건안 26년(221년), 군하(群下-뭇 수하)들이 선주에게 황제를 칭할 것을 권하자 선주는 허락지 않았다.  
 
제갈량이 설득했다, 
 
“옛날 오한(吳漢), 경엄(耿弇) 등이 처음 세조(世祖-후한 광무제 유수)께 제위에 오를 것을 권하니 세조께서 사양한 것이 앞뒤로 네 번쯤 됩니다. 그러자 경순(耿純)이 진언하길, ‘천하 영웅들이 우러러 따르며 소망하는데, 만약 의견에 따르지 않는다면 사대부들은 각각 돌아가 주인을 찾을 것이고 공을 따르는 이가 없게 될 것입니다’라 하니, 세조께서 경순의 말이 심히 지극함에 감격하시어 마침내 허락하셨습니다. 
 
지금 조씨(曹氏)가 한(漢)을 찬탈하여 천하에 주인이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유씨(劉氏)의 묘족(苗族-일가 피붙이)으로 세계(世係)를 계승해 몸을 일으켰으니 지금 제위에 오르심이 마땅합니다. 대왕을 따라 오랫동안 근고(勤苦-부지런히 힘씀)한 자들이 또한 경순의 말처럼 척촌(尺寸-일척 일촌. 작고 사소함)의 공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에 선주가 제위에 오르고 제갈량을 승상(丞相)으로 삼으며 책문(策文)에서 말했다, 
 
“짐은 황실이 불행을 만나 대통(大統)을 봉승(奉承)하고, 삼가고 두려워하며 감히 스스로 강녕(康寧-건강하고 편안함)함을 꾀하지 않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려고 하나 능히 그럴 수 없을까 두렵도다. 아! 승상 제갈량은 짐의 뜻을 다하여, 짐의 허물을 보좌하는데 태만하지 말고, 중광(重光-누세의 성덕)을 선양하는 것을 도와 천하에 비추도록 할 것이니, 그대는 힘쓸지어다.” 
 
제갈량을 승상 녹상서사(錄尙書事-행정장관), 가절(假節-군법을 어긴사람을 죽일수있는 권한)로 삼았다. 장비가 죽은 후 사례교위(수도 근처~)를 겸하게 했다.

장무 3년(223년) 봄, 선주는 영안(永安)에서 병이 깊어지자 성도에 있던 제갈량을 불러 뒷일을 부탁했다. 제갈량에게 말했다, 

“그대의 재능이 조비의 열 배에 달하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시고, 그가 재능 있는 인물이 아니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도록 하시오.”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이 감히 고굉지력(股肱之力-신하로서의 헌신)을 다하고 충정지절(忠貞之節-충정의 절개)에 힘쓸 것이니, 죽기로 계속할 것입니다.” 
 
선주는 또 후주에게 조칙을 내렸다, 
 
“너는 승상과 함께 일을 처리하고 승상을 이 아비처럼 섬겨라.” 

건흥(建興) 원년(223년), 제갈량을 무향후(武鄕侯)에 봉하고 부서를 열어 정무를 처리하게 했다.(개부치사 開府治事) 얼마 후 또 익주목을 겸하게 했다. (영 익주목) 대소 정사(政事)를 막론하고 모두 제갈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남중(南中)의 여러 군(郡)이 아울러 반란을 일으켰는데, 제갈량은 이제 국상을 당했으므로 곧바로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고, 또한 오(吳)에 사자를 보내 화친을 맺어 마침내 여국(與國-우호국, 동맹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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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안 20년(215년), 손권은 선주가 이미 익주를 얻었다 하여, 사자를 보내 형주를 돌려받고자 한다고 통보했다. 선주가 말했다, 
 
“양주(涼州)를 얻으면 형주(荊州)를 주겠소.” 
손권이 분노하여, 여몽을 보내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陽)의 세 군(郡)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선주는 군사 5만을 이끌고 공안(公安)으로 내려가고, 관우에게 익양(益陽-장사군 익양현)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 해, 조공이 한중을 평정하자 장로는 파서(巴西)로 달아났다. 선주가 이를 듣고 손권과 화해하니, 형주를 분할해 강하, 장사, 계양은 동쪽(손권)에 속하게 하고, 남군, 영릉, 무릉은 서쪽(유비)에 속하게 하고는, 군을 이끌고 강주(江州-파군 강주현)로 돌아왔다. 황권을 보내 군을 이끌고 가서 장로를 맞이하게 했으나 장로는 이미 조공에 항복한 뒤였다. 
 
조공은 하후연, 장합을 한중에 주둔하게 하고, 여러 번 파(巴)의 경계를 침범했다.

선주는 장비에게 명해 탕거(宕渠-파군 탕거현)로 진병하게 하자, 와구(瓦口)에서 싸워 장합 등을 격파했다. 장합은 군사를 거두어 남정(南鄭-한중군 남정현)으로 돌아갔고, 선주 또한 성도로 돌아갔다.

  
건안 23년(218년), 선주가 제장들을 이끌고 한중으로 진병했다. 장군 오란(吳蘭), 뇌동(雷銅) 등을 나누어 보내 무도(武都-양주 무도군)로 들어가게 했으나 모두 조공의 군대에게 함몰되었다. 선주가 양평관(陽平關)에 머물며 하후연, 장합 등과 서로 맞섰다.
 
건안 24년(219년) 봄, 양평에서 남쪽으로 면수(沔水)를 건너 산을 따라 점차 전진하여 정군산(定軍山)에 영채를 세웠다. 하후연이 군을 이끌고 와서 그 땅을 다투었다. 선주는 황충에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이를 공격하게 하여 하후연군을 대파하고, 하후연과 조공이 임명한 익주자사 조옹(趙顒) 등을 참수했다. 
조공이 장안으로부터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했다. 선주가 멀리서 이를 헤아려 말했다, 
“비록 조공이 온다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니 내가 반드시 한천(漢川)을 지키겠다.” 
조공이 도착하자 선주는 군사들을 모아 험고한 곳을 지키고 끝내 교봉(交鋒-교전)하지 않자 (조공이) 여러 달이 지나도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사망자가 날로 많아졌다. 
 
여름, 조공은 과연 군을 이끌고 돌아가니 선주가 마침내 한중을 차지했다. 유봉(劉封), 맹달(孟達), 이평(李平) 등을 보내 상용(上庸)에서 신탐(申耽)을 공격했다. 
가을, 군하(群下많은 신하)들이 선주를 올려 한중왕(漢中王)으로 삼고, 한나라 황제에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렸다.
 

“평서장군(平西將軍) 도정후(都亭侯) 신(臣) 마초(馬超), 좌장군(左將軍) 장사(長史) 영(領) 진군장군(鎭軍將軍) 신 허정(許靖), 영사마(營司馬) 신 방희(龐羲), 의조종사중랑(議曹從事中郎) 군의중랑장(軍議中郎將) 신 사원(射援),

군사장군(軍師將軍) 신 제갈량(諸葛亮), 탕구장군(盪寇將軍) 한수정후(漢壽亭侯) 신 관우(關羽), 정로장군(征虜將軍) 신정후(新亭侯) 신 장비(張飛), 정서장군(征西將軍) 신 황충(黃忠), 진원장군(鎭遠將軍) 신 뇌공(賴恭), 양무장군(揚武將軍) 신 법정(法正), 흥업장군(興業將軍) 신 이엄(李嚴) 등이 120인이 상언합니다. 

 
옛날 당요(唐堯-요임금)는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조정에 사흉(四凶-요임금 때 공공共工, 환두驩兜, 삼묘三苗, 곤鯀) 이 있었고, 주 성왕(周成王)이 어질고 현명했으나 4국(四國-주무왕의 아우인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과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에게 각각 봉해진 나라)이 작난(作難)했습니다. 고후(高后-한고조의 황후인 여태후)가 칭제(稱制)하자 여(呂)씨들이 천명을 훔치고, 효소제(孝昭帝)가 유충(幼沖-나이가 어림)하자 상관씨(상관걸上官桀)가 역모하였으니, 이들 모두가 세총(世寵-당대의 은총)을 빙자하여 국권을 짓밟고 극도로 흉악하게 난을 일으켜 사직을 위태롭게 하였습니다. 대순(大舜-순임금), 주공(周公), 주허(朱虛-주허후 유장劉章), 박륙(博陸-박륙후 곽광霍光)이 없었다면 이들을 유방(流放-내쫓음)하고 금토(禽討-사로잡아 주륙함)할 수 없어 위태롭고 기울어졌을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성덕(聖德)을 타고나 만방(萬邦)을 통리(統理)하시나 액운(厄運)을 만나 이를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동탁이 먼저 난을 일으켜 경기(京畿)를 탕복(蕩覆-휩쓸고 뒤집어엎음)하고, 조조가 뒤이어 화(禍)를 일으켜 천형(天衡-천자의 권위)을 훔쳤습니다. 황후, 태자가 짐살(鴆殺)당했고, 천하를 박란(剝亂-찢고 어지럽힘)하며 민물(民物-백성과 만물)을 잔훼(殘毁)했습니다. 오래도록 폐하께서 몽진(蒙塵) 길에 올라 근심과 재앙을 뒤집어쓰게 하며 텅 빈 읍에 유폐시켰습니다. 사람과 신령에 주인이 없게 하여 왕명을 막아 끊고, 황극(皇極-제왕의 법도. 치우침 없는 중정中正의 도)을 싫어하여 가리며 신기(神器-제위, 정권을 비유)를 도적질하려 합니다. 
 
좌장군 영 사례교위 예, 형, 익 삼주목(豫荊益三州牧-예주목, 형주목, 익주목) 의성정후(宜城亭侯) 유비는 조정의 작질(爵秩-작위와 봉록)을 받아, 힘을 다하여 국난에 목숨을 바칠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비는 일찍이) 그 조짐을 보고 혁연(赫然)히 분발(憤發-분격)하여 거기장군 동승과 공모하니, 조조를 주살해 장차 국가를 안정시키고 옛 도읍을 안녕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동승이 일을 다룸이 치밀하지 못해, 조조의 유혼(遊魂)이 마침내 악으로 자라나 해내(海內)를 잔민(殘泯-잔멸)케 했습니다. 신 등은 늘 왕실에 크게는 염락(閻樂)의 화나 작게는 정안(定安)의 변이 있을까 두려우니, 숙야(夙夜-아침저녁)로 췌췌(惴惴-두려워하는 모양)하고 전율(戰慄-두려워서 몸이 떨림), 누식(累息-숨을 죽이고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함)할 지경입니다. 
옛날 우서(虞書-서경 우서편)에서 ‘敦序九族’(돈서구족-9족의 질서를 잡고 두텁게 대우함)이라 했고, 주나라 때는 2대(하, 은)를 본받아 동성(同姓)을 봉건(封建)했으며, [시경]에서 그런 뜻을 드러낸 지 이미 오래입니다. 한나라가 처음 흥하였을 때 강토를 나누어 자제들을 왕으로 올리니 이로써 여러 여씨들의 난을 꺾고 태종(太宗-전한 문제의 묘호)의 기업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신 등이 보건대, 유비는 폐부(肺腑-허파. 친밀한 관계를 비유), 지엽(枝葉-방계일족)에 종자(宗子-종실 자제), 번한(藩翰-울타리와 기둥)으로, 국가를 염려하고 난을 그치게 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조조를 한중에서 격파한 이래 해내의 영웅들이 명망을 우러르며 의부(蟻附-개미가 달라붙듯 많은 이들이 귀부함)하나, 작호(爵號)가 높지 않고 구석(九錫)이 더해지지 않으니 사직을 진위(鎭衛-진수하고 보위함)하여 만세(萬世)에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깥에서 천자의 명을 받들려 해도 예명(禮 命-조정의 책명)이 단절되어 있습니다. 옛날 하서(河西)태수 양통(梁統) 등은 한(漢)이 중흥할 때에 이르러(왕망 말 후한 초) 산하(山河)에 가로막히고, 지위와 권한이 같아 서로 능히 통솔하지 못하자, 모두 함께 두융(竇融)을 추거해 원수(元帥)로 삼으니, 끝내 효적(效績-공적)을 세우고 외효(隗囂)를 격파했습니다. 지금 사직의 어려움은 농(隴), 촉(蜀) 때보다(농서의 외효와 촉의 공손술) 더 급박합니다. 조조는 밖으로 천하를 집어삼키고 안으로 뭇 신료들을 잔멸하여 조정에 소장지위(蕭牆之危-내부의 위험)가 있으니, 어모(禦侮-모욕을 막아냄)하지 않는다면 가히 천하인 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할 만 합니다. 
이에 신 등이 옛 제도에 의거해 유비를 한중왕으로 봉하고 대사마로 삼아, 육군(六軍)을 동제(董齊-영도)하고 동맹을 규합하여 흉역(凶逆)을 소멸(掃滅-소탕)하려 합니다. 한중(漢中), 파(巴), 촉(蜀), 광한(廣漢), 건위(犍爲)를 국(國)으로 삼고, 부서를 설치한 것은 한나라 초 제후왕의 옛 제도에 따랐습니다. 무릇 권의(權宜-임시적인 편의. 임시방편)의 제도가 실로 사직에 이롭다면 이를 임의로 했다해도 가합니다. 그 연후에 공(功)이 이루어지고 일이 세워지면 신 등은 물러나 교죄(矯罪-군주의 명을 가탁한 죄)를 받을 것이니, 설령 죽임을 당한다 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마침내 면양(沔陽-한중군 면양현)에 단장(壇場-제단을 마련해놓은 곳)을 설치하여 군사들을 벌려 세우고, 뭇 신하들이 배위(陪位-배석)하여 상주문 읽기를 마친 후 선주에게 왕관(王冠)을 씌웠다.
 
선주가 한나라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신은 구신(具臣-수효만 채우는 변변찮은 신하)의 재주로 상장(上將)의 임무를 맡아 삼군(三軍)을 동독(董督-통솔)하고 바깥에서 명을 받들었으나, 도적을 쓸어 없애 왕실을 바로잡지 못해 오래도록 폐하의 성스러운 교화를 쇠미하게 하고 육합(六合-천하, 우주)의 내부가 막혀 통하지 않게 하니, 근심으로 반측(反側-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임)하고 열병을 앓는 듯합니다. 

 
지난 날 동탁이 난을 일으킨 이후 군흉(群兇)들이 종횡하여 해내(海內)를 잔박(殘剝-해치고 찢음)했습니다. 폐하의 성덕(聖德), 위령(威靈)에 힘입어 사람과 신령이 함께 감응하니, 혹 충의로운 자가 떨쳐 일어나 토벌하고, 혹 상천(上天-하늘)이 벌을 내려 포역(暴逆-난폭하여 도리를 거스름)한 자들을 모두 죽여 얼음이 점차 녹듯 모두 사라졌으나, 오직 조조만이 오래도록 효제(梟除-제거)되지 않아 국권을 침천(侵擅-침범하여 농단함)하며 방자한 마음으로 극히 어지럽히게 되었습니다. 
 
신이 예전에 거기장군 동승과 함께 조조토벌을 도모했으나, 일을 다룸이 치밀하지 못해 동승은 해를 입게 되었고, 신은 거처를 잃고 파월(播越-외지로 망명함. 방랑함)하여 충의를 열매 맺지 못하니, 마침내 조조가 극히 흉역하게도 주후(主后-황후)를 육살(戮殺-살륙)하고 황자(皇子)를 짐독으로 해치게 하였습니다. 비록 동맹을 규합하고 힘을 떨치려 했으나 (신이) 나약(懦弱) 불무(不武)하여 여러 해를 지나도록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항상 이 몸이 죽어 국은(國恩)을 저버릴까 두려우니, 자나 깨나 길이 탄식하고 해가 저물도록 근심합니다. 
 
지금 신의 뭇 신료들이 이르길, 옛 우서(虞書-서경 우서편)에서 ‘敦敘九族, 庶明勵翼’(돈서구족 서명려익)이라 하고 
오제(五帝)는 여기서 빼고 더했지만 이 도를 폐하진 않았으며, 주나라는 2대(하, 은)를 본받아 희(姬)씨 들을 세워 실로 진(晉), 정(鄭)의 보필에 힘입었고, 고조(高祖)께서 용흥(龍興-용이 날아오름. 제왕이 흥기함을 비유)한 후 자제(子弟)들을 왕으로 높여 9국(國)을 크게 여니 끝내 여(呂)씨들을 베어 대종(大宗-적장자 계보; 황실)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하며, 지금 조조가 곧고 바른 것을 미워하고 그 무리가 실로 번성하여 화심(禍心-재앙을 일으키려는 마음)을 품고 찬도(簒盜-제위를 도적질함)할 뜻이 이미 드러났으나, 종실(宗室)이 미약하고 제족(帝族-황족)들에게 지위가 없으니, 이에 옛 법식을 참조하고 권의(權宜-임시방편)에 잠시 의지한다 하여 신을 대사마(大司馬) 한중왕(漢中王)으로 올렸습니다. 
 
신이 엎드려 스스로 세 번 돌아보건대, 나라의 후은(厚恩)을 받아 일방(一方-한쪽 방면)에서 임무를 맡았으나, 힘을 써도 성과가 없고 얻은 바가 이미 지나치게 많은데, 다시 높은 지위를 욕되게 해 죄와 비방을 무겁게 함은 마땅한 일이 아니나, 뭇 신료들이 의(義)로써 신을 핍박합니다. 
 
신이 물러나 생각해보건대, 구적(寇賊-도적)을 효수하지 못하는 한 국난이 끝나지 않고, 종묘가 위태롭고 사직이 장차 무너지려 하니 실로 신이 쇄수(碎首-머리를 부숨. 죽음을 각오한 행동을 비유)해야 할 때이니, 만약 응권통변(應權通變-시의에 응해 변통함)하여 성조(聖朝)를 평안케 할 수 있다면 비록 불과 물에 뛰어드는 일이라 할지라도 사양치 않을 것인데 감히 상의(常宜)를 염려해 후회를 방비하겠습니까. 이에 중의(衆議-중론)를 따라 인새(印璽-옥새)를 배수(拜受-공손히 받음)하여 나라의 위엄을 높이려 합니다. 
 
작호(爵號)를 우러러 생각하면 지위는 높고 은총은 두터우며, 보효(報效-힘써 보답함)할 일을 곰곰이 생각하면 근심은 깊고 책임은 중하니, 경포누식(驚怖累息-놀랍고 두려워 숨을 죽임)함이 마치 골짜기에 임한 듯합니다. 진력수성(盡力輸誠-힘을 다하고 정성을 쏟음)하여 육사(六師-육군六軍)를 독려하고, 뭇 의로운 이들을 이끌고 천시에 순응해, 흉역(凶逆)을 박토(撲討-토벌)하고 사직을 안녕케 해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겠습니다. 삼가 배장(拜章-장章을 올림)하고 (※) 역(驛-역참)을 통해 좌장군, 의성정후의 인수는 반환해 올립니다.”
 
 

그리고 성도로 돌아와 다스리고, 위연(魏延)을 뽑아 도독으로 삼아 한중(漢中)을 진수하게 했다.

이때 관우가 조공의 장수 조인(曹仁)을 공격하고, 번(樊)성에서 우금(于禁)을 사로잡았다. 갑자기 손권이 관우를 습격해 죽이고 형주를 차지했다.

 
건안 25년(220년), 위문제(魏文帝-조비)가 존호(尊號)를 칭하고 연호를 고쳐 황초(黃初)라고 했다. 혹 전해 듣기로 한나라 황제가 해를 입었다 하니, 이에 선주는 발상(發喪)하여 상복을 입고, 시호를 추존해 효민황제(孝愍皇帝)라 했다. 이 이후로 여러 곳에서 뭇 길조들이 있다고 말하여 해와 달처럼 서로 잇대었다.(日月相屬) 
 
이 때문에 의랑 양천후(陽泉侯) 유표(劉豹), 청의후(靑衣侯) 상거(向擧), 편장군 장예(張裔), 황권(黃權), 대사마 속(屬) 은순(殷純), 익주 별가종사 조작(趙莋), 치중종사 양홍(楊洪), 종사좨주 하종(何宗), 의조종사 두경(杜瓊), 권학종사(勸學從事) 장상(張爽), 윤묵(尹黙), 초주(譙周) 등이 상언했다
- “신이 듣기로 하도(河圖), 낙서(洛書), 오경참위(五經讖緯)는 공자가 살핀 것으로 험응(驗應-드러난 징조가 들어맞음)이 오래되었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낙서견요도(洛書甄曜度)에서 
 
‘붉은 기운이 3일 나타나 덕이 창성하면 9세 때에 이르러 비를 만나고(會備-유비의 비 암시. 備는 갖추다로 보는 게 맞겠지만, 황제즉위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해 참위서를 인용하는 이들의 의도에 맞추어 풀었음. 이하 같음) 합해져 황제의 때가 된다.’
 
고 했고, 낙서 보호명(洛書寶號命)에서 
 
‘하늘이 제왕의 도를 헤아려 비(備)가 칭황(稱皇)하고 악계(握契)를 통솔하니, 백번 성공하고 실패하지 않는다.’ 
 
했고, 낙서녹운기(洛書錄運期)에서
 
‘아홉 제후와 일곱 호걸이 천명을 다투어 백성들이 취해(炊骸-해골을 삶아먹음. 기근의 참상을 형용)하고, 도로에서 사람의 머리를 밟고 다니니, 누가 주관하여 현(玄)하고(유비현덕의 현 암시) 위로하겠는가.’
 
라 했고, 효경구명결록(孝經鉤命決錄)에서 
 
‘제(帝)가 세 번 세워지고 아홉 번 비(備)를 만난다.’
 
고 했습니다. 
 
신의 아비들이 살아있을 때 말하길, 남서쪽에 여러 차례 누런 기운이 있어 몇 장(丈)이나 곧바로 선 것을 여러 해 동안 보았는데, 때때로 상서로운 구름과 바람이 선기(璿璣-선성과 기성. 북두칠성의 두 번째, 세 번째 별)에서 아래로 내려와 이에 호응했다 하니, 이는 괴이하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또한 건안 22년(217년) 중, 여러 차례 깃발 같은 기운이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르며 중천(中天-하늘의 한가운데)을 운행했는데, [하도], [낙서]에서는 
 
‘필히 천자가 그 방향에서 나온다.’
 
고 했습니다. 게다가 올해 태백(太白-금성), 형혹(熒惑-화성), 전성(塡星-토성)이 항상 세성(歲星-목성)을 따라 서로 뒤쫓았습니다. 가까이로는 한나라가 처음 흥할 때 오성(五星-수, 금, 화, 목, 토성)이 세성(歲星)을 따르며 꾀했는데, 세성(歲星)은 의(義)를 주관하며 한나라는 서쪽에 위치하고 의(義)의 위쪽 방위이니, (※ ‘인의예지신’의 오상을 방위로 배치하면 각각 동서남북중앙, 즉 의義가 서쪽) 이 때문에 한나라 법에서는 항상 세성으로 인주(人主-군주)를 살폈던 것입니다. 응당 익주에서 성주(聖主-성스러운 군주)가 흥기하여 중흥할 것이나, 이때에는 허도에 황제가 살아 계시므로 군하(群下)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요즈음 형혹이 또 세성을 뒤쫓아 위(胃), 묘(昴), 필(畢) 자리에서 보였습니다. (※위, 묘, 필은 별자리 28수 중 서궁 7수에 속함), 묘(昴), 필(畢)은 천강(天綱-하늘의 벼리. 대강)이고 [역경]에서는 ‘제성(帝星)이 이곳에 있으면 뭇 사악한 것들이 소멸되고 패망한다.’고 했습니다. 성휘(聖諱-군주나 옛 성인의 이름자)가 미리 보이고(※앞에 낙서견요도 등을 인용하며 끌어다 붙인 ‘비’나 ‘현’ 자 등을 말하는 듯), 헤아림이 때에 이르러 증험되고 부합(符合)한 것이 여러 번이며, 이 같은 일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신이 듣기로 
 
‘성왕(聖王)은 하늘보다 먼저 하여도 하늘에 거스르지 않고, 하늘보다 뒤에 하여도 천시를 따르는 것’ 
 
(先天而天不違, 後天而奉天時 / 역경)이라 하니, 이 때문에 때에 응하여 생겨나고 신(神)과 더불어 합치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하늘에 응(應)하고 백성에 순(順)하여 속히 대업을 펴시고, 이로써 해내(海內)를 안정시키십시오.”
 

태부(太傅) 허정(許靖), 안한장군(安漢將軍) 미축(糜竺), 군사장군(軍師將軍) 제갈량(諸葛亮), 태상(太常) 뇌공(賴恭), 광록훈(光祿勳) 황주(黃柱), 소부(少府) 왕모(王謀) 등이 상언했다.

- “조비(曹丕)가 찬역, 시해하여 한실(漢室)을 멸하고 신기(神器)를 훔쳐 차지하고는, 충량(忠良-충성스럽고 선량함)한 이들을 겁박하며 혹독 무도하니, 사람과 귀신이 모두 분독(忿毒-극히 분노하고 원망함)하여 모두 유씨(劉氏)를 그리워합니다. 지금 위로는 천자가 없어 해내가 황황(惶惶-몹시 두려워함)해하나 본받고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앞뒤로 상서한 군하(群下)들이 8백여 명으로, 이들이 모두 부서(符瑞-상서로운 징조)와 도(圖), 참(讖)이 명징(明徵)함을 진술했습니다. 

 
그 사이에 황룡(黃龍)이 무양(武陽-건위군 무양현) 적수(赤水)에서 보였다가 9일 만에 사라졌습니다. 효경원신계(孝經援神契)에서는 ‘덕(德)이 깊은 못에 이르면 황룡이 보인다.’고 했으며 용은 군주의 상징입니다. [역경]의 건(乾)괘 95에서 ‘飛龍在天’(비룡재천)이라 했고, 대왕께서는 용처럼 날아오르니 응당 제위에 오르셔야 합니다. 
 
또한 예전에 관우가 번, 양양을 포위했을 때 양양의 남자 장가(張嘉), 왕휴(王休)가 옥새(玉璽)를 헌상했는데, 옥새는 한수(漢水)에 잠겨 깊은 샘에 엎드려 있었으나, 대낮에도 찬란하게 빛나 신령한 광채가 하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무릇 한(漢)은 고조(高祖)께서 일어나 천하를 평정한 국호인데, 대왕께서는 선제(先帝-이전 황제. 여기서는 고조 유방)의 발자취를 좇아 또한 한중(漢中)에서 흥하셨습니다. 지금 천자의 옥새에 신이한 광채가 먼저 보여 한수(漢水)의 끝인 양양에서 출현하고 대왕께서 그 하류에서 이를 받드시니, 이는 분명 대왕께 천자의 지위를 수여한다는 것이며 상서로운 길조와 천명이 서로 부합한 것으로,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옛날 주나라에는 오어(烏魚)의 길조가 있어 사람들이 모두 경사로 여겼고, 2조(二祖-고조 유방과 광무제 유수)가 천명을 받을 때는 [하도], [낙서]에서 미리 드러나니 이로써 징험(徵驗)이 되었습니다. 지금 상천(上天)이 상서로움을 알리고, 군유(群儒-뭇 유생), 영준(英俊-영웅준걸)들이 아울러 하도, 낙서, 공자의 참기(讖記)를 올리며 모두 갖추어 이르고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대왕께서는 효경황제, 중산정왕의 후손으로, 본지백세(本支百世-본파와 지파가 오래도록 이어짐)하여 하늘과 땅이 복을 내리고, 성스런 자태가 석무(碩茂-크게 무성함)하여 신무(神武)함을 몸에 갖추고, 인(仁)으로 뒤덮고 덕을 쌓으며 애인호사(愛人好士-사람을 사랑하고 선비를 아낌)하니, 이로써 사방의 민심이 귀의하고 있습니다. 영도(靈圖-하도)를 살피고 참위서를 열어보니 신명(神明)이 나타나고 명휘(名諱-이름)가 밝게 드러나 있으니, 의당 제위에 올라 2조를 이어 소목(昭穆제사)을 계승한다면(※) 천하에 심히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신 등은 삼가 박사(博士) 허자(許慈), 의랑(議郎) 맹광(孟光)과 함께 예의(禮儀-예법과 의식)를 건립하고 좋은 날을 택해 존호(尊號)를 올립니다.”

이에 성도 무담(武擔)의 남쪽에서 황제에 즉위하고,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건안 26년(221년) 4월 병오일, 황제 유비는 감히 현모(玄牡-희생용 검은 소)를 써서 황천(皇天)의 상제(上帝)와 후토(后土-땅)의 신기(神祇-천신과 지신)에 밝게 고합니다. 한나라가 천하를 차지해 역수(歷數)가 무궁했으나, 일찍이 왕망이 찬역하자 광무황제가 진노하여 이를 주살하고 사직을 다시 보존했습니다. 지금 조조가 무력에 의거하여 안인(安忍-잔인한 짓을 예사로 저지름)하니, 주후(主后)를 육살(戮殺-살륙)하고 도천(滔天-하늘에 차고 넘칠 정도로 죄악이 큼)하게 중국을 망치며 천현(天顯-하늘의 뜻)을 되돌아보지 않았고, 조조의 아들 조비는 흉역한 마음을 품고는 신기(神器)를 훔쳐 차지했습니다. 군신(群臣-뭇 신하), 장사(將士)들이 이르길, 사직이 무너지려 하니 저 유비가 응당 이를 닦아 2조의 대업을 잇고 천벌을 공행(龔行-봉행)해야 한다 했습니다. 

 
저 유비는 덕이 없어 제위(帝位)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 서민(庶民-백성)과 바깥의 만이(蠻夷) 군장(君長)들에게 물으니 그들이 모두 말하길, ‘천명에는 응답하지 않을 수 없고, 조업(祖業-선조의 유업)은 오래도록 폐할 수 없으며, 사해(四海)에 주인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며, 솔토(率土-온 나라 땅)가 저 유비 한 사람을 의지하며 바라봅니다. 천명을 두려워하고 또한 한조(漢阼-한나라의 제위)가 장차 땅에 떨어질 것을 근심하여, 삼가 원일(元日-길일)을 택해 백료(百寮-백관)들과 함께 단(壇)에 올라 황제의 새수(璽綬-옥새와 인끈)를 받듭니다. 번예(燔瘞-제사물품)를 마련해 천신(天神)께 고류(告類-황제나 황태자 즉위식 등 때에 행하는 제사의식)하니, 신들께서는 흠향하시고 한가(漢家)에 복을 주어 사해를 영원히 평안케 하소서
 
장무(章武) 원년(221년) 여름 4월,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제갈량(諸葛亮)을 승상(丞相), 허정(許靖)을 사도(司徒)로 삼고, 백관(百官)을 두고 종묘(宗廟)를 세워 고황제 이하 선조들에게 협제(祫祭-멀고 가까운 선조를 함께 크게 제사지냄)했다
 
5월, 황후(皇后) 오씨(吳氏)를 세우고 아들 유선(劉禪)을 황태자로 삼았다.
 
6월, 아들 유영(劉永)을 노왕(魯王), 유리(劉理)를 양왕(梁王)으로 삼았다. 거기장군 장비(張飛)가 좌우(左右-주변인)에 의해 해를 입었다. 
 
당초 선주는 손권이 관우를 습격한 일에 분노하여 장차 동쪽을 정벌하려 했었다. 이에 가을 7월, 마침내 제군(諸軍)을 이끌고 오(吳)를 정벌했다. 손권은 서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선주는 몹시 성내며 허락지 않았다. 오의 장수 육의(陸議-육손), 이이(李異), 유아(劉阿) 등은 무(巫-형주 남군 무현), 자귀(秭歸-남군 자귀현)에 주둔했다. 오반(吳班), 풍습(馮習)이 무(巫)현에서부터 이이 등을 공파(攻破)하고 자귀에 주둔했다. 무릉(武陵)의 오계만이(五谿蠻夷무릉의 5소수민족)가 사자를 보내 군사를 청했다. 
장무 2년(222년) 봄 정월, 선주군(先主軍)은 자귀로 돌아오고, 장군 오반(吳班), 진식(陳式)의 수군(水軍)은 이릉(夷陵-남군 이릉현)에서 장강을 끼고 동서 연안에 주둔했다.
2월, 선주가 친히 제장들을 이끌고 자귀에서 진군하여, 산을 따라 고개를 넘어 이도(夷道-남군 이도현) 효정(猇亭)에 주둔했다. 한산(佷山)에서 무릉으로 통하여 시중 마량(馬良)을 보내 오계만이를 위로하자, 이들이 모두 서로 잇따르며 호응했다. 진북장군 황권은 장강 북쪽의 제군을 감독하며 이릉도(夷陵道)에서 오군(吳軍)과 서로 맞섰다. 
여름 6월, 누런 기운이 자귀에서부터 10여 리 되는 곳에서 보였는데 그 넓이가 수십 장에 이르렀다. 그 10여 일 뒤, 육의(陸議)가 선주군을 효정에서 대파하고, 장군 풍습(馮習), 장남(張南) 등이 모두 전몰했다. 
선주는 효정에서 자귀로 돌아와 흩어진 군사들을 수합(收合-거두어 합침)하여 마침내 배를 버리고 육로로 어복(魚復-익주 파군 어복현)으로 돌아왔고, 어복현을 영안(永安)으로 고쳤다. 오(吳)에서는 장군 이이, 유아 등을 보내 선주군을 뒤쫓게 하여 남산(南山)에 주둔했다.
 
가을 8월, 군사를 거두어 무(巫)현으로 돌아왔다. 사도 허정이 죽었다.
 
겨울 10월, 승상 제갈량에게 조령을 내려 성도의 남북 교외에서 영건(營建제사)하도록 했다. 손권은 선주가 백제(白帝)에 머문다는 것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선주가 이를 허락하고 태중대부 종위(宗瑋)를 보내 보명(報命-답례)했다.
겨울 12월, 한가(漢嘉)태수 황원(黃元)이 선주의 병이 깊다는 것을 듣고 군을 일으켜 거수(拒守-막아서 지킴)했다. (※ [진서] 지리지에 의하면, 장무 원년 후한 때의 촉군속국 → 한가군)
장무 3년(223년) 봄 2월, 승상 제갈량이 성도로부터 영안에 도착했다.
 
3월, 황원이 진병하여 임공현(臨邛縣-촉군 임공현)을 공격했다. 장군 진홀(陳曶)을 보내 황원을 토벌했다. 황원은 군이 패하고 장강을 따라 내려갔는데, 그 친병(親兵 친히거느리는 병사)에게 결박되어 산 채로 성도로 보내져 참수되었다. 선주는 병이 깊어지자 승상 제갈량에게 탁고(託孤-고아를 맡김)하고 상서령 이엄(李嚴)이 이를 돕게 했다.
 
여름 4월 계사일, 선주가 영안궁(永安宮)에서 조(殂)했다. 그때 나이 63세였다.
 
제갈량이 후주에게 상언했다 
 
- “엎드려 생각건대, 대행황제(大行皇帝-대행은 제왕이 죽은 후 시호를 정하기 전 임시로 부르던 호칭)께서는 인(仁)에 힘쓰고 덕(德)을 세워 (인, 덕으로) 부도(覆燾-뒤덮고 널리 비춤)함이 무궁했으나 하늘이 어여삐 여기지 않아 오래도록 침질(寢疾-중병으로 앓아누움)하시더니 이번 달 24일에 홀연 승하(升遐)하셨습니다. 신첩(臣妾)들이 부르짖으며 우니 마치 죽은 부모의 상을 치르는 것 같습니다. 
 
이에 유조(遺詔-임금의 유언)를 돌아보니, 상을 치르는 일에는 대종(大宗)을 염려해 그 동용(動容-거동과 몸가짐)에 더하고 뺌이 있었습니다. 백료(百寮-백관)들은 발상하여 사흘을 채우면 상복을 벗고 매장하는 날에 이르러 다시 예법에 따르게 하고, 군국(郡國)의 태수, 상(相), 도위(都尉), 현령, 현장들은 사흘이 지나면 상복을 벗으라 했습니다. 신 제갈량은 직접 칙계(敕戒)를 받았으므로 신령(神靈)을 두려워하여 감히 이를 어길 수 없습니다. 신이 청컨대, 선하(宣下-조령을 내림)해 봉행(奉行)하시기 바랍니다.”
5월, 재궁(梓宮-임금의 관)이 영안에서 성도로 돌아왔고, 시호를 소열황제(昭烈皇帝)라 했다.
 
가을 8월, 혜릉惠陵)에 매장했다.

 

평한다. 선주는 홍의(弘毅-포부가 크고 굳셈), 관후(寬厚-너그럽고 후함)하고 지인(知人-사람을 알아 봄), 대사(待士-선비를 잘 대우함)하니 한 고조의 풍도와 영웅의 그릇을 갖추었던 것 같다.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탁고했으나 심신(心神-마음)에 두 갈래가 없었으니 실로 군신(君臣)의 지공(至公-지극히 공정함)함은 고금의 성궤(盛軌-아름다운 본보기)다. 기권(機權-기지와 임기응변), 간략(幹略-재능과 모략)은 위무제에는 미치지 못해 이 때문에 그 영토는 협소했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헤아리고, 오로지 이익만을 다투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려 했다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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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표가 선주에게) 하후돈(夏侯惇), 우금(于禁) 등을 박망(博望-남양군 박망현)에서 막게 했다. 얼마 뒤, 선주는 복병(伏兵)을 두고 하루아침에 스스로 둔영을 불사르고 거짓으로 달아났는데, 하후돈 등이 이를 추격하다 복병에 의해 격파되었다. 
건안 12년 (207년), 조공이 북쪽으로 오환(烏丸)을 정벌하자 선주는 유표에게 허도를 습격하도록 설득했으나 유표는 이 계책을 쓰지 않았다.

조공이 남쪽으로 유표를 정벌하자 때마침 유표가 죽고 아들인 유종(劉琮)이 그를 대신해 서고,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선주는 번(樊)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공이 졸지에 당도한 것을 몰랐다. (조공의 군이) 완(宛-남양군 완현)에 이르렀을 때야 이를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양양을 지날 때 제갈량이 선주를 설득하기를, 유종을 공격해 형주를 차지하라고 했다. 선주가 말했다,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소.”
 이에 말을 멈추고 유종을 부르자 유종이 두려워하며 일어나지 못했다. 유종의 좌우(左右-주변인, 측근)와 형주인들 다수가 선주에게 귀부했다.

당양(當陽-형주 남군 당양현)에 도착했을 무렵 그 무리가 십여 만에 이르고 치중(輜重-짐수레)이 수천 량(兩)으로 하루에 10여 리 밖에 가지 못하자, 별도로 관우를 보내 배 수백 척을 타고 가서 강릉(江陵-남군 강릉현)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떤 이가 선주에게 말했다, 
 
“의당 신속히 행군해 강릉을 보전해야 합니다. 지금 비록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있으나 갑옷을 입은 자는 적으니, 만약 조공의 군사가 도착한다면 이를 어찌 막으려 하십니까?” 
 
선주가 말했다, 
 
“무릇 큰일을 이룰 때는 필히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법이오. 지금 사람들이 내게 귀부하는데 내가 어찌 차마 버리고 떠나겠소!”

조공은 군비가 충실한 강릉을 선주가 먼저 점거하는 것을 두려워해, 치중(輜重)을 내버려두고 경군(輕軍-경병)으로 양양에 도착했다. 
 
선주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듣고 조공은 정기(精騎-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이를 추격했다.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달려 당양의 장판(長阪)에 이르렀다. 선주는 처자를 버리고 제갈량, 장비, 조운 등 수십 기를 이끌고 달아났고, 조공은 그의 무리들과 치중을 크게 노획했다. 
 
선주는 한진(漢津)을 비껴 달려가다 관우의 배를 만나 면수(沔水-한수)를 건널 수 있었고, 유표의 장자(長子)인 강하(江夏)태수 유기(劉琦)의 군사 만여 명을 만나 함께 하구(夏口-한수가 장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선주가 제갈량을 보내 손권과 결친했다.

손권은 주유(周瑜), 정보(程普)등 수군(水軍) 수만을 보내 선주와 힘을 합해, 조공과 적벽(赤壁)에서 싸워 이를 대파하고 그 주선(舟船-배)을 불태웠다.

선주는 오군(吳軍)과 함께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고, (조공의 군을) 추격해 남군(南郡)에 이르렀다. 이때 또한 질역(疾疫-역병)이 돌아 북군(北軍-조조군)에 사망자가 많자, 조공이 군을 이끌고 되돌아갔다.

선주는 표를 올려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고 또한 남쪽으로 4군(四郡)을 정벌했다. 무릉(武陵)태수 김선(金旋), 장사(長沙)태수 한현(韓玄), 계양(桂陽)태수 조범(趙範), 영릉(零陵)태수 유도(劉度)가 모두 항복했다.  여강(廬江)의 뇌서(雷緖)는 부곡 수만 명을 이끌고 계상(稽顙-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함. 투항함)했다. 
유기가 병들어 죽자 군하(群下-뭇 부하)들이 선주를 추대해 형주목으로 삼고 공안(公安,공공의 평온과 안전)을 다스렸다. 손권이 점차 이를 두려워해 여동생을 시집보내 우호를 굳건히 했다. 선주가 경(京-경구京口)에 이르러 손권을 만나고, 은기(恩紀-은정)를 주무(綢繆-끈끈히 얽어맴)했다. 

손권은 사자를 보내 함께 촉(蜀)을 취하자고 했다. 어떤 이가 의당 청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하며 오(吳)는 끝내 형(荊) 땅을 넘어 촉을 소유할 수 없으니 촉 땅은 가히 우리가 차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형주 주부(主簿) 은관(殷觀)이 진언했다, 
 
“만약 오(吳)의 선구(先驅-선두, 선봉)가 된다면, 나아가서는(進) 능히 촉을 이길 수 없고, 물러나서는(退) 오(吳)가 이를 틈탈 것이니 일이 어그러질 것입니다. 지금 다만 그들이 촉을 치는 것을 도와주는 것처럼 하되, 우리가 새로이 여러 군(郡)을 점거하여 군을 일으켜 움직일 수 없다고 하면, 필시 오(吳)는 감히 우리를 넘어 홀로 촉을 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퇴지계(進退之計나아가고 물러나는 전략)를 이처럼 하면 가히 오(吳), 촉(蜀)의 이익을 거둘 수 있습니다.” 
 
선주가 이에 따르자 손권은 과연 (촉을 칠) 계획을 그만두었다. 은관을 올려 별가종사(別駕從事 주목이나 자사의 중요 보좌관)로 삼았다.
 
건안 16년(211년), 익주목 유장(劉璋)은 조공이 장차 종요(鍾繇) 등을 보내 한중으로 향하여 장로(張魯)를 토벌한다는 것을 멀리서 듣고, 내심 두려움을 품게 되었다. 
 
별가종사 촉군(蜀郡)의 장송(張松)이 유장을 설득했다, 
 
"조공의 군사는 강하고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으니 만약 장로의 물자를 이용해 촉 땅을 취하려 한다면 누가 능히 막겠습니까?” 
 
유장이 말했다, 
 
“내가 이 일로 우려하고 있으나 아직 계책이 없소.” 
 
장송이 말했다,
 
“유예주(劉豫州)는 사군(使君)의 종실(宗室)이며 조공의 깊은 원수이고, 용병(用兵)을 잘하니 만약 그로 하여금 장로를 치게 한다면 필시 장로를 격파할 것입니다. 장로가 격파되면 익주가 강성해지니 비록 조공이 온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유장이 이를 옳게 여겼다. 법정(法正)을 보내 4천 명을 이끌고 선주를 맞도록 하고 앞뒤로 거억(巨億)의 선물을 보냈다. 이로 인해 법정은 (선주에게) 익주를 취할 계책을 진언했다.
 
선주는 제갈량, 관우 등을 남겨 형주를 지키게 하고는, 보졸(步卒-보병) 수만 명을 이끌고 익주로 들어갔다. 부(涪-익주 광한군 부현)에 이르러 유장이 몸소 나와 영접하니 서로 만나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장송이 법정을 통해 선주에게 고하고 아울러 모신(謀臣모사에 뛰어난 신하) 방통(龐統)이 진언하길, 만난 자리에서 유장을 습격하도록 권했다. 선주가 말했다, 
 
“이는 큰일이니 창졸간에 할 수 없소.” 
 
유장은 선주를 행 대사마, 영 사례교위(대사마-군대 지휘 와 영 내 사례교위-관리감찰,감독 직을 겸임)로 추천하고 선주는 또한 유장을 행 진서대장군, 영 익주목(진서대장군-반란진압 와 익주목을 겸임)으로 추천했다. 유장은 선주의 군사를 늘려주어 장로를 공격하도록 하고 또한 백수군(白水軍-백수는 광한군 백수현)을 지휘하도록 했다. 선주의 군사는 통틀어 3만여 명에, 수레, 갑옷, 기계, 물자가 매우 많았다. 
 
이 해, 유장은 성도로 돌아갔다. 선주는 북쪽으로 가맹(葭萌-광한군 가맹현)에 도착하고, 즉시 장로를 치지 않고 은덕을 후하게 베풀어 중심(衆心-민심)을 거두었다.
  
다음해(212년), 조공이 손권을 정벌하자 손권은 선주에게 구원을 청했다. 
선주가 사자를 보내 유장에게 고했다, 
“조공이 오(吳)를 정벌하니 오(吳)에서는 위급함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손씨(孫氏)와 고(孤-나)는 본래 순치(脣齒-입술과 이)의 관계입니다. 또한 악진(樂進)이 청니(靑泥)에서 관우와 서로 맞서고 있으니 지금 가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으면 악진이 필시 대승할 것이고, 그들이 군을 돌려 주(州)의 경계를 침범한다면 장로보다 더욱 심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장로는 스스로를 지키는 적이니 족히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 유장에게 군사 1만과 물자를 청하고 동쪽으로 가려고 했다. 유장은 다만 군사 4천을 허락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절반만을 주었다

장송이 선주와 법정에게 서신을 보냈다, 

 
“지금 대사가 거의 이루어지려 하는데, 어찌 이를 내버려두고 떠나려 하십니까!” 
 
장송의 형 광한태수 장숙(張肅)은 화(禍)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 그 모의를 유장에게 고했다. 이에 유장이 장송을 붙잡아 참수하자, (유비와 유장 사이에) 혐극(嫌隙-서로 싫어해 벌어진 틈)이 처음 생기게 되었다.
유장은 관문을 지키는 제장들에게 문서를 보내, 다시는 선주와 관통(關通-결탁하거나 내통함)하지 말도록 명했다.  
선주가 대노해 유장의 백수군독(白水軍督,백수군의 수장?) 양회(楊懷)를 불러 무례함을 질책하며 참수했다. 이에 황충(黃忠), 탁응(卓膺)을 시켜 군을 이끌고 유장에게 향하도록 했다. 선주는 곧바로 관(關) 안으로 들어가 제장, 사졸들의 처자를 인질로 잡고, 황충, 탁응과 함께 군을 이끌고 부(涪)현으로 진격해 그 성을 점거했다. 유장은 유괴(劉璝), 냉포(冷苞), 장임(張任), 등현(鄧賢) 등을 보내 부(涪)에서 선주를 막게 했으나  모두 격파되었고, 물러나 면죽(綿竹-광한군 면죽현)에 의지했다.
유장은 다시 이엄을 보내 면죽의 제군을 지휘하게 했으나, 이엄은 무리들을 이끌고 선주에게 항복했다. 선주의 군이 더욱 강성해지자 제장들을 나누어 보내 속현들을 평정했다.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은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백제(白帝), 강주(江州), 강양(江陽)을 평정하고, 오직 관우만이 남아 형주를 진수했다. 선주가 진군하여 낙(雒-광한군 낙현)을 포위했다. 이때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이 성을 수비했는데 공격을 받고 근 1년이 지났다.
 건안 19년(214년) 여름, 낙성(雒城)이 격파되었다

진군하여 성도(成都-촉군 성도현)를 포위한 지 수십 일 만에 유장이 성을 나와 항복했다. 

촉이 부유하고 풍성하니 선주는 주연을 베풀어 사졸들을 크게 대접하고 촉성(蜀城) 중의 금은을 취해 제장들에게 나누어주고 곡식과 비단은 되돌려 보냈다. 

 
선주는 또 익주목(益州牧)을 겸했는데(영 익주목), 제갈량을 고굉(股肱-신임하는 중신), 법정을 모주(謀主-주요한 모사), 관우, 장비, 마초 등을 조아(爪牙-용맹한 무장), 허정(許靖), 미축(麋竺), 간옹(簡雍)을 빈우(賓友-빈객 같은 벗)로 삼았다. 동화(董和), 황권(黃權), 이엄(李嚴) 등은 본래 유장이 임용했고, 오일(吳壹), 비관(費觀) 등은 또한 유장의 혼친(婚親-인척)이고, 팽양(彭羕)은 또한 유장에게 배척되었고, 유파는 예전에 기한(忌恨-증오하고 원망함)한 자이나, 이들 모두를 현임(顯任-현요직)에 두어 그 기량과 재능을 다하게 하니, 뜻있는 선비치고 다투어 힘쓰지 않는 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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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주(先主)는 성이 유(劉), 휘가 비(備)이고, 자(字)는 현덕(玄德)이다. 탁군(涿郡) 탁현(涿縣) 사람으로, 한(漢) 경제(景帝)의 아들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예이다

 
원수(元狩) 6년(B.C 117)에 유승의 아들 유정(劉貞)이 탁현의 육성정후(陸城亭侯)에 봉해졌으나, 주금(酎金) 문제에 좌죄되어 후작을 잃고 이로 인해 (지도에서 범양에) 일가를 이루었다.
 [주; 주금이란 매년 8월 천자가 종묘에 제사지낼 때, 제후왕이나 열후들이 부조형식으로 돕는다는 의미에서 봉헌하는 황금을 말합니다. 그런데 전한 무제 때(원수가 바로 무제 때의 연호중 하나입니다), 제후왕들의 세력을 꺾고 전제정치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이 주금에 불순물이 섞여 있다거나 정해진 양에 모자란다는 죄목으로 많이 이의 작위를 빼앗습니다. 유비의 조상도 이 때 걸린 것입니다]

선주(先主)의 조부 유웅(劉雄), 부친 유홍(劉弘)은 대대로 주군(州郡,중앙이 아닌 지역을 뜻하는듯)에서 복무했다. 유웅은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동군범령(東郡范令-연주 동군 범현의 현령)에 이르렀다.

선주(先主-유비)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친과 함께 신발을 팔고 자리 엮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집 남동쪽 모퉁이 울타리 위에 뽕나무가 높이 자라 다섯 장(丈) 남짓 되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잎과 가지가 무성하여 마치 거개(車蓋-수레덮개)

처럼 보였다.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이 나무를 괴이하고 범상치 않게 여겼으며, 어떤 이는 이 집에서 응당 귀인(貴人)이 나올 것이라 했다

선주가 어릴 때 종중(宗中)의 여러 아이들과 함께 나무 아래에서 놀면서 말했다,
 
“나는 꼭 이렇게 깃털로 장식된 덮개가 있는 수레에 탈거야.” 
 
숙부 유자경(劉子敬)이 말했다, 
 
“너는 허튼소리 말거라. 우리 가문을 망치겠구나!”
 
15 세가 되자 모친이 학문을 익히도록 하자, 동종(同宗)인 유덕연(劉德然), 요서(遼西) 사람인 공손찬(公孫瓚)과 함께 예전에 구강(九江)태수를 지낸 같은 군(郡) 출신의 노식(盧植)을 섬기게 되었다. 유덕연의 부친인 유원기(劉元起)는 항상 선주에게 비용을 대어주어 유덕연과 똑같이 대했다. 
 
유원기의 처가 말했다, 
“각자가 따로 일가를 이루고 있는데 어찌 항상 이처럼 도울 수 있겠습니까!” 
 
유원기가 말했다, 
 
“우리 종중의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오.” 
 
공손찬과 깊이 교우를 맺었는데 공손찬의 나이가 더 많았으므로 선주는 그를 형으로 섬겼다. 
 
선주는 책 읽는 것은 아주 즐기지는 않고, 개나 말, 음악, 아름다운 의복을 좋아했다. 신장은 7척 5촌에 (173츠) 손을 아래로 내리면 무릎에 닿았고 눈을 돌려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 
말수가 적고 아랫사람들을 잘 대해주며 기쁨이나 노여움을 얼굴표정에 드러내지 않았고, 호협(豪俠)들과 교우를 맺는 것을 좋아하니 젊은이들이 다투어서 그를 따랐다. 
중산(中山-기주 중산국)의 대상(大商)인 장세평(張世平)과 소쌍(蘇雙) 등은 재산이 천금이었는데, 말 장사하러 탁군을 돌아다니다 선주를 보고는 그를 남다르게 여겨 많은 돈과 재물을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선주는 많은 무리들을 모을 수 있었다.
  
영제(靈帝:168-189) 말, 황건(黃巾)이 봉기하자 주군(州郡)에서 각각 의병(義兵)을 일으켰는데, 선주는 그 부하들을 이끌고 교위 추정(鄒靖)을 좇아 황건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안희위(安喜尉-중산국 안희현의 현위)에 제수되었다. 

독우(督郵-군郡의 감찰관) 가 공적인 일로 (안희)현에 도착했다. 선주가 그를 만나기를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곧바로 들어가 독우를 묶고 장(杖) 2백 대를 때렸다. 그리고 인끈을 풀어 그의 목에 걸고는 그를 말뚝(馬枊)에 묶어두고 관직을 버린 채 달아났다.

얼마 후 대장군 하진(何進)이 도위(都尉) 관구의(毌丘毅)를 보내 단양(丹楊)으로 가서 모병하게 했다. 선주가 그와 함께 행동하다가 하비(下邳)에 이르러 적(賊)을 만났는데, 힘써 싸워 공을 세우고 하밀승(下密丞-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다. 다시 관직을 버렸다. 그 뒤 고당위(高唐尉-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었다가 (고당현)령으로 승진했다

현이 적(賊)에게 격파되자 중랑장 공손찬에게로 달아났다. 공손찬은 표를 올려 (선주를) 별부사마(장군 밑에 사마중에 따라 수하를 둘수있음)로 삼고, 청주자사 전해(田楷)와 함께 기주목 원소(袁紹)를 막도록 했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자 잠시 평원령(平原令-평원국 평원현의 현령)을 맡고 그 뒤 평원상(平原相-평원국의 국상. 태수급)을 겸했다

군민(郡民)인 유평(劉平)이 평소 선주를 깔보며 그 아래에 있음을 수치스러워 하여, 객(客-문객, 노객)을 보내 선주를 찔러 죽이게 했다. 객(客)이 차마 찌르지 못하고 그 일을 털어놓고 떠나니, 그가 인심을 얻은 것이 이와 같았다.

원소가 공손찬을 공격하자 선주는 전해와 함께 동쪽으로 가서 제(齊 -청주 제국)에 주둔했다. 
 
조공(曹公-조조)이 서주(徐州)를 정벌하자(194년의 일) 서주목 도겸(陶謙)은 사자를 보내 전해에게 위급함을 고했고, 전해는 선주와 함께 이를 구원했다. 이때 선주는 스스로 군사 천여 명과 유주(幽州) 오환(烏丸)의 잡다한 호기(胡騎-이민족 기병)를 거느리고 있었고 또한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을 얻었다. 
 
서주에 도착한 후 도겸이 단양병(丹楊兵) 4천을 선주에게 보태어주자 마침내 전해를 떠나 도겸에 귀부했다. 도겸은 표를 올려 선주를 예주자사로 삼고 소패(小沛)에 주둔하게 했다. 
 
도겸은 병이 깊어지자 별가(別駕) 미축(麋竺)에게 말했다, 
 
“유비가 아니면 이 서주를 안정시킬 수 없소.” 
 
도겸이 죽자 미축은 주(州)의 백성들을 이끌고 선주를 영접했으나 선주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비의 진등(陳登)이 선주에게 말했다, 
“지금 한실(漢室)이 능지(陵遲-쇠퇴)하고 해내(海內-천하)가 뒤집어지려 하니, 공을 세우고 대사를 이루는 것은 금일에 달려 있습니다. 서주는 풍요롭고 호구(戶口)가 백만이니, 부디 사군(使君-주자사에 대한 경칭)께서 뜻을 굽혀 이 주(州)를 맡아 주십시오.” 
선주가 말했다, 
“원공로(袁公路-원술)가 가까이 수춘에 있소. 그는 사세오공(四世五公-4대에 걸쳐 삼공을 다섯 명 배출함)의 명문이고 해내가 그에게 귀부하고 있으니 가히 그에게 맡길 만하오.” 
 
진등이 말했다, 
 
“공로(公路)는 교호(驕豪-교만)하여 난을 다스릴만한 주인이 아닙니다. 지금 사군(使君)을 위해 보기(十萬) 10만을 모으려 하니, 가히 위로는 군주를 도와 백성을 구제하여 (춘추) 오패(五霸)의 업을 이루고, 아래로는 할지(割地-땅을 나누어 차지함)하여 변경을 지키며 공(功)을 죽백(竹帛)에 남길 만합니다. 만약 사군이 제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저 진등도 사군의 뜻에 따르지 않겠습니다.” 
 
북해상(北海相) 공융(孔融)이 선주에게 말했다, 
 
“원공로가 어찌 우국망가(憂國忘家-나라를 걱정하느라 집안일을 잊음)할 자겠소? 무덤 속에 있는 (원씨 조상의) 고골(枯骨-해골)을 어찌 개의한단 말이오? 오늘의 일은 백성이 유능한 이에게 맡기자는 것이니,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고 뒷날 후회해도 늦을 것이오.”
 
이에 선주가 서주를 다스리게 되었다

원술이 와서 선주를 공격하자 선주는 우이(盱眙-하비국 우이현.=盱台), 회음(淮陰-하비국 회음현)에서 이를 막았다. 조공(曹公-조조)이 표를 올려 선주를 진동장군(갖가지 명목의 잡호장군으로 장관과 비슷한 직위)으로 삼고 의성정후(宜城亭侯)에 봉하니, 이 해가 건안 원년(196년)이다. 

 
선주는 원술과 한 달 넘게 서로 대치했는데, 여포가 빈틈을 타 하비를 습격했다. 하비의 수장(守將) 조표(曹豹)가 배반하고 그 틈에 여포를 맞아들였다. 여포가 선주의 처자(妻子)를 사로잡자 선주는 군을 돌려 해서(海西)에 주둔했다.
 
양봉(楊奉), 한섬(韓暹)은 서주(徐州), 양주(揚州) 사이에서 도적질했는데, 선주가 이를 격퇴하고 모두 참수했다. 선주는 여포에게 화친을 구하고 여포는 선주의 처자를 되돌려 보냈다. 선주는 관우(關羽)를 보내 하비를 지키게 했다.
  
선주는 소패(小沛)로 돌아와 다시 군사를 합쳐 만여 명을 얻었다. 
여포가 이를 꺼려 친히 출병해 선주를 공격했고 선주는 패주해 조공(曹公-조조)에게 귀부했다. 조공이 그를 후대하고 예주목(豫州牧)으로 삼았다. 장차 패(沛)로 가서 흩어진 군졸들을 거두려 하자, (조공은) 군량을 대어주고 군사들을 보태어 동쪽으로 여포를 공격하게 했다. 여포가 고순(高順)을 보내 이를 공격하자 조공은 하후돈(夏侯惇)을 보냈으나 능히 구원할 수 없었고 고순에게 패했으며, (고순은) 다시 선주의 처자를 사로잡아 여포에게 보냈다. 
 조공은 친히 출병해 동쪽을 정벌하고 선주를 도와 하비에서 여포를 포위했다가 사로잡았다
선주는 다시 처자를 되찾고, 조공을 따라 허도로 되돌아왔다. 표를 올려 선주를 좌장군(잡호장군보다 조금 높음)으로 삼고 예우가 더욱 중해지니 출행할 때는 같은 수레에 타고 앉을 때는 같은 자리에 앉았다. 
 
원술이 서주를 지나 북쪽으로 원소에게 가려고 하자, 조공은 선주를 보내 주령(朱靈), 노초(路招)를 이끌고 원술을 요격(要擊)하게 했는데, 도착하기 전에 원술이 병으로 죽었다. 선주가 출발하기 전, 헌제(獻帝)의 구(舅-장인) 거기장군(궁궐을 보위하는 높은 직위의 장군) 동승(董承)이 이르길 황제의 의대(衣帶)를 받으니 그 속에 조공을 주살하라는 밀조(密詔)가 있었다고 했다. 선주는 아직 실행하지 못했다. 
이무렵 조공이 선주에게 조용히 말했다, 
“지금 천하의 영웅은 오직 사군(使君,주목을 이르는말)과 나 조조뿐이오. 본초(本初-원소) 같은 무리는 족히 여기에 낄 수 없소.” 
선주는 막 밥을 먹고 있다가 비저(匕箸-수저)를 떨어뜨렸다

마침내 동승, 장수교위(황궁 경호부대무관) 충집(种輯), 장군 오자란(吳子蘭), 왕자복(王子服-후한서에 의하면 왕복王服)등과 함께 공모했는데, 때마침 원술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어 실행하지 못했다. 일이 발각되어 동승 등이 모두 복주(伏誅-처형)되었다.

선주가 하비를 점거하고, 주령 등은 되돌아왔다. 이에 선주는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죽이고, 관우를 남겨 하비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왔다

동해(東海)의 창패(昌霸)가 모반하고 군현들 다수가 조공(曹公)을 배반하고 선주 편에 서니 그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고, 손건(孫乾)을 보내 원소와 연화(連和-연결하여 화친함)했다. 조공이 유대(劉岱), 왕충(王忠)을 보내 이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건안 5년(200년), 조공이 동쪽으로 선주를 정벌하자 선주가 패적(敗績-대패)했다.

조공은 그 군사들을 모두 거두고 선주의 처자를 붙잡고, 아울러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선주는 청주(靑州)로 달아났다. 청주자사 원담(袁譚)은 선주의 옛 무재(茂才,자사가 천거하는자)였기에 보기(步騎-보병과 기병)를 이끌고 선주를 맞이했다. 선주는 원담을 따라 평원에 도착했고 원담은 급히 사자를 보내 원소에게 고했다. 원소는 장수를 보내 도로에서 봉영(奉迎-영접)하고 자신은 업(鄴)에서 2백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선주와 서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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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전기 양중팀에 들어온지 2달이 다 되어가고 

요샌 공수도 많이 나오고 잡일도 많아져서 월급 루팡들이 많아졌다

사람이란 존재가 얼마나 얄팍하고 한없이 가볍기는 하지만

자기들 스스로가 자기 몫을 해주지 못하고 월급루팡 모드로 눈치만 보며 비겁하게 사는거 보면

참 안타깝다 생각이 들면서 저런 사람과는 사귀면 안되겠다라는 교훈을 준다

 

내가 처음 들어오고 30대에 한 반장님은 항상 열심히 많은 일을 하였는대

난 처음 그것을 이해를 못했다

왜 그냥 다 같이 쉬엄 쉬엄하면 되지 저렇게 열정적으로 혼자 할러고 하지?

 

요새 하두 월급루팡에 치이다보니 

그 행동에는 이게 답일러나는 생각이 들었다

어짜피 월급루팡들 신경써봤자 스트레스만 받고 내 할일을 열심히 하자

아직 그 반장님이랑 그 행동에 이유를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럴꺼 같다 :)

 

나도 그 형들처럼 야비한 월급루팡이 되기전에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 돈 마다 품성이 다르며 가능하면 품질(시간과 바꾼 노동이나 사업)이 좋은 돈을 모아야 좋다 
  • 가족 내에서 부자가 됬을때 아직 규모가 작으면 지출도 작게하고 가족을 흩어지지 않게 하기 50억원쯤 되면 어느정도 가족내 지원해도 된다 100억이 넘었다면 많이 베풀고 가족 내 보험이 되어야한다 
  • 실패할 권리 - 실패는 두려워하지말고 그것으로 성장하면 된고 다시 도전하면 성공은 따라 올것이다
  • 책으로 지식을 얻고 또 그 잘못된 책이 있다면 그것이 맞는 말인가인지도 보아야한다
  • 신은 세상에 관여하지 않으므로 공평하다 , 그러므로 자신 스스로 일어나자 
  • 이익의 적정부분만 투자하자, 경영을 어느정도 할줄 알아야한다 
  • 좋은 동업자와 동업을 위해 문서와 공증이 완벽하게 하면 동업해도 된다 
  • 길을 모를땐 큰길로 간다 - 주식 1등 기업 or 부동산 큰길내 부동산등등 - 리스크적고 수익적음
  • 쿼터법칙을 이용해서 타인과 비슷한 자산을 가진 사람의 1/4 의기준점을 가지면서 소비하면서 산다
  • 부자는 노력 지혜 기회 운이 합쳐져 이뤄진다
  • 결정을 방향과 속도 - 재산을 모을땐 농부처럼 투자할땐 어디든 돈이 될만할 곳에 신속하게 어부가 된다 그리고 위기가 올때 대비를 하고 어떤 기회가 생길때는 빠른 실행력을 보여준다
  • 일어나자 기지개를 펴라 근육을 풀어주고 기를 받는다 , 잠자리 정리하면서 감사함을 느낀다 , 공복에 물한잔을 마시자 몸을 상쾌하게 해줌 , 일정한 시간에 자고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라 -신용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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