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

선주는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습격해 죽이고, 관우에게 하비성(下邳城)을 지키며 태수의 일을 행하도록 하고(行太守事) 자신은 소패(小沛)로 돌아갔다.
건안 5년(200), 조공(曹公-조조)이 동쪽을 치자 선주는 원소(袁紹)에게로 달아났다. 조공은 관우를 사로잡고 돌아와 편장군(偏將軍 낮은 직위의 장군)에 임명하고 매우 두텁게 예우했다.
“경이 시험 삼아 그의 뜻을 물어보시오”
라고 했다. 그 뒤 장료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말했다,
손권이 군대를 보내 선주를 도와 조공을 막았고 조공이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선주는 강남(江南-장강 남쪽)의 여러 군을 거두어들이고는 으뜸 되는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관직를 주었으며 관우를 양양(襄陽)태수 탕구장군(盪寇將軍-잡호장군 중 하나 )으로 삼아 강북(江北-장강 북쪽)에 주둔하게 했다. 선주가 서쪽으로 익주(益州)를 평정할 때 관우를 동독형주사(董督荊州事-형주의 사무를 지휘 감독)로 임명했다.
또 남군태수 미방(麋芳)이 강릉(江陵)에 있고 장군 사인(士仁)이 공안(公安)에 주둔했는데 (※) 그들 모두는 관우가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것에 평소 원한을 품었었다.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거하고 관우 사중(士衆-사졸)들의 처자를 모두 사로잡자 관우군이 마침내 흩어졌다.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역격(逆擊)하고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關平)을 임저(臨沮-형주 남군 임저현)에서 참(斬)했다.
관우에게 시호를 추증해 장무후(壯繆侯)라 했다.
아들 관흥(關興)이 후사를 이었다
평한다.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세의 호신(虎臣-범 같은 신하)이었다. 관우는 조공(曹公)에게 보효(報效-힘써 보답함)하고 장비는 의(義)로써 엄안(嚴顔)을 놓아주었으니 아울러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관우는 강이자긍(剛而自矜-굳세고 자부심이 강함)하고 장비는 폭이무은(暴而無恩-난폭하고 은혜롭지 않음)하여 자신의 단점으로써 패망하게 되었으니 이수(理數-도리,이치)의 상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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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2
건흥 3년(225년) 봄, 제갈량이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고 그해 가을에 모두 평정했다.
건흥 5년(227년), 제군(率諸)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한중(漢中)에 주둔했다. 출병에 즈음하여 상소(上疏)했다
- “선제(先帝-이전 황제 즉 유비)께서 창업한 후 반도 이루시기 전에 중도에 붕조(崩殂-붕어)하시고,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뉘고 익주는 피폐했으니 이는 실로 위급(危急), 존망(存亡)의 때입니다. 그러나 가깝게지내는 신하가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런 장수가 밖에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선제의 후은을 잊지 못해 폐하께 보답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실로 성청(聖聽-임금이 귀로 듣는 것)을 널리 열어 선제께서 남긴 덕을 빛내고 지사(志士)들의 의기를 넓히셔야 하며, 함부로 스스로를 비루한 사람이라 낮추고 대의를 잃은 비유를 들어 충간(忠諫)이 들어오는 길을 막으셔서는 안 됩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근신(謹愼-삼가고 조심함)함을 아시고 이 때문에 붕어하실 때 신에게 큰일을 맡기셨습니다. 명을 받은 이래 밤낮으로 근심하고 탄식하며, 부탁받은 바에 힘쓰지 못해 선제의 밝음을 상하게 될까 두려워하니, 이 때문에 5월에 노수(瀘水)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이제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병갑(兵甲-병기와 갑옷) 또한 넉넉하니 응당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해야 합니다. 노둔(駑鈍-미련하고 둔함)한 재주를 다해 간흉(姦凶)을 물리치고 한실을 부흥해 구도(舊都-옛 수도, 즉 낙양, 장안)로 돌아가려 합니다. 이것이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하는 신의 직분(職分-직책과 본분)이며, 손익(損益)을 헤아려 극력으로 충언을 올리는 것은 곽유지, 비의, 동윤의 임무입니다.

위(魏) 명제(明帝)는 서쪽으로 가서 장안을 지키고 장합(張郃)에게 명하여 제갈량을 막게 했다. 제갈량은 마속(馬謖)에게 선두에서 제군(諸軍)을 이끌게 해 가정(街亭)에서 장합과 싸우게 했다.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節度-명령, 지휘통제)를 어기고 거동(擧動)이 실의(失宜-부적절함)하여 장합에게 대파 당했다. 제갈량은 서현(西縣-천수군 서현)의 천여 가(家)를 뽑아 한중으로 되돌아오고 마속을 죽여 군사들에게 사죄했다.
상소를 올렸다,
건흥 9년(231년), 제갈량이 다시 기산(祁山)으로 출병했다. 목우(木牛)로 운송했는데, 군량이 다 떨어져 퇴각하다 위(魏)의 장수 장합(張郃)과 교전해, 활을 쏘아 장합을 죽였다.
서로 대치한 지 백여 일이 지나 그해 8월, 제갈량이 질병으로 군중에서 죽으니, 이때 나이 54세였다
군이 퇴각하자 선왕(宣王-사마의)이 그의 영루(營壘)와 처소(處所)를 둘러보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奇才)로다!”
제갈량은 한중(漢中) 정군산(定軍山)에 매장하도록 유언했는데, 산에 의지해 분묘를 만들고 무덤은 관이 들어갈 정도로만 하며, 평상복으로 염하고 기물(器物)을 쓰지 말도록 했다.
평한다. 제갈량은 상국(相國)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의궤(儀軌-예법의 본보기)를 보이고, 관직을 간략히 하여 권제(權制-임시 제도)에 따르고, 성심을 열어 공도(公道)를 베풀었다. 충성을 다하고 보탬이 된 자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주고, 법을 어기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한 자라도 반드시 벌주었다. 죄를 인정하고 실토한 자는 비록 중죄라도 반드시 풀어주고, 헛된 말로 교묘히 꾸미는 자는 비록 가벼운 죄라도 반드시 죽였다. 선행이 작다 하여 상주지 않는 일이 없고, 악행이 작다 하여 문책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모든 일을 정련(精練)히 하여 그 근본을 다스리고, 명분에 따라 그 실질을 책임지우며(명분과 실질이 서로 부합하게 했다는 말) 헛된 것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마침내 나라 안 모든 이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경애하고, 비록 형정(刑政)이 준엄했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그 마음 씀이 공평하며 권하고 경계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가히 다스림을 아는 빼어난 인재(識治之良才)로 관중, 소하의 아필(亞匹-버금가는 짝)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임기응변의 지략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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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1
제갈량(諸葛亮)의 자는 공명(孔明)이고, (서주) 낭야(琅邪)군 양도(陽都)현 사람이다. 한(漢) 사례교위(수도방위 및 행정 및 감찰관) 제갈풍(諸葛豐)의 후예다.

제갈현이 죽자 제갈량은 몸소 밭이랑에서 농사지었으며, 양보음(梁父吟)을 부르기 좋아했다.
신장 8척으로 늘 자신을 관중(管仲), 악의(樂毅)에 비교했으나 당시 사람들은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 오직 친한 벗으로 지내던 박릉(博陵-기주 박릉군)의 최주평(崔州平), 영천(潁川-예주 영천군)의 서서(徐庶) 원직(元直) 만이 참으로 그러하다고 인정했다.
이때 선주(先主-유비)가 신야(新野-형주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서(徐庶)가 선주를 만나보자 선주가 그를 중히 여겼다. 서서가 선주에게 말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와룡(臥龍-누워있는 용)입니다. 장군께서는 그를 보고 싶으십니까?”
유기는 깨닫는 바가 있어 밖으로 나갈 것을 은밀히 꾀했다. 때마침 황조(黃祖)가 죽자 밖으로 나가 강하(江夏)태수가 되었다.
선주가 하구(夏口)에 도착하자 제갈량이 말했다,
제갈량이 말했다, “전횡(田橫)은 제나라의 장사(壯士)이나 오히려 의(義)를 지키며 모욕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조공은 적벽(赤壁)에서 패하자 군을 이끌고 업(鄴)으로 돌아갔다. 선주는 마침내 강남(江南-장강 남쪽)을 거두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으로 삼아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감독하며 부세(賦稅)를 거두어 군실(軍實-군대의 무기와 양식)을 채우게 했다.
건안 16년(211년), 익주목 유장(劉璋)이 법정(法正)을 보내 선주를 영접하고 장로(張魯)를 공격하게 했다. 제갈량은 관우와 함께 형주를 진수했다. 선주가 가맹(葭萌-익주 광한군 가맹현)에서 돌아와 유장을 공격하니, 제갈량은 장비, 조운 등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군현들을 나누어 평정하고, 선주와 함께 성도를 포위했다.
장무 3년(223년) 봄, 선주는 영안(永安)에서 병이 깊어지자 성도에 있던 제갈량을 불러 뒷일을 부탁했다. 제갈량에게 말했다,
건흥(建興) 원년(223년), 제갈량을 무향후(武鄕侯)에 봉하고 부서를 열어 정무를 처리하게 했다.(개부치사 開府治事) 얼마 후 또 익주목을 겸하게 했다. (영 익주목) 대소 정사(政事)를 막론하고 모두 제갈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남중(南中)의 여러 군(郡)이 아울러 반란을 일으켰는데, 제갈량은 이제 국상을 당했으므로 곧바로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고, 또한 오(吳)에 사자를 보내 화친을 맺어 마침내 여국(與國-우호국, 동맹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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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선주) -3

선주는 장비에게 명해 탕거(宕渠-파군 탕거현)로 진병하게 하자, 와구(瓦口)에서 싸워 장합 등을 격파했다. 장합은 군사를 거두어 남정(南鄭-한중군 남정현)으로 돌아갔고, 선주 또한 성도로 돌아갔다.
“평서장군(平西將軍) 도정후(都亭侯) 신(臣) 마초(馬超), 좌장군(左將軍) 장사(長史) 영(領) 진군장군(鎭軍將軍) 신 허정(許靖), 영사마(營司馬) 신 방희(龐羲), 의조종사중랑(議曹從事中郎) 군의중랑장(軍議中郎將) 신 사원(射援),
군사장군(軍師將軍) 신 제갈량(諸葛亮), 탕구장군(盪寇將軍) 한수정후(漢壽亭侯) 신 관우(關羽), 정로장군(征虜將軍) 신정후(新亭侯) 신 장비(張飛), 정서장군(征西將軍) 신 황충(黃忠), 진원장군(鎭遠將軍) 신 뇌공(賴恭), 양무장군(揚武將軍) 신 법정(法正), 흥업장군(興業將軍) 신 이엄(李嚴) 등이 120인이 상언합니다.
“신은 구신(具臣-수효만 채우는 변변찮은 신하)의 재주로 상장(上將)의 임무를 맡아 삼군(三軍)을 동독(董督-통솔)하고 바깥에서 명을 받들었으나, 도적을 쓸어 없애 왕실을 바로잡지 못해 오래도록 폐하의 성스러운 교화를 쇠미하게 하고 육합(六合-천하, 우주)의 내부가 막혀 통하지 않게 하니, 근심으로 반측(反側-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임)하고 열병을 앓는 듯합니다.
그리고 성도로 돌아와 다스리고, 위연(魏延)을 뽑아 도독으로 삼아 한중(漢中)을 진수하게 했다.
이때 관우가 조공의 장수 조인(曹仁)을 공격하고, 번(樊)성에서 우금(于禁)을 사로잡았다. 갑자기 손권이 관우를 습격해 죽이고 형주를 차지했다.
태부(太傅) 허정(許靖), 안한장군(安漢將軍) 미축(糜竺), 군사장군(軍師將軍) 제갈량(諸葛亮), 태상(太常) 뇌공(賴恭), 광록훈(光祿勳) 황주(黃柱), 소부(少府) 왕모(王謀) 등이 상언했다.
- “조비(曹丕)가 찬역, 시해하여 한실(漢室)을 멸하고 신기(神器)를 훔쳐 차지하고는, 충량(忠良-충성스럽고 선량함)한 이들을 겁박하며 혹독 무도하니, 사람과 귀신이 모두 분독(忿毒-극히 분노하고 원망함)하여 모두 유씨(劉氏)를 그리워합니다. 지금 위로는 천자가 없어 해내가 황황(惶惶-몹시 두려워함)해하나 본받고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앞뒤로 상서한 군하(群下)들이 8백여 명으로, 이들이 모두 부서(符瑞-상서로운 징조)와 도(圖), 참(讖)이 명징(明徵)함을 진술했습니다.
이에 성도 무담(武擔)의 남쪽에서 황제에 즉위하고,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건안 26년(221년) 4월 병오일, 황제 유비는 감히 현모(玄牡-희생용 검은 소)를 써서 황천(皇天)의 상제(上帝)와 후토(后土-땅)의 신기(神祇-천신과 지신)에 밝게 고합니다. 한나라가 천하를 차지해 역수(歷數)가 무궁했으나, 일찍이 왕망이 찬역하자 광무황제가 진노하여 이를 주살하고 사직을 다시 보존했습니다. 지금 조조가 무력에 의거하여 안인(安忍-잔인한 짓을 예사로 저지름)하니, 주후(主后)를 육살(戮殺-살륙)하고 도천(滔天-하늘에 차고 넘칠 정도로 죄악이 큼)하게 중국을 망치며 천현(天顯-하늘의 뜻)을 되돌아보지 않았고, 조조의 아들 조비는 흉역한 마음을 품고는 신기(神器)를 훔쳐 차지했습니다. 군신(群臣-뭇 신하), 장사(將士)들이 이르길, 사직이 무너지려 하니 저 유비가 응당 이를 닦아 2조의 대업을 잇고 천벌을 공행(龔行-봉행)해야 한다 했습니다.
평한다. 선주는 홍의(弘毅-포부가 크고 굳셈), 관후(寬厚-너그럽고 후함)하고 지인(知人-사람을 알아 봄), 대사(待士-선비를 잘 대우함)하니 한 고조의 풍도와 영웅의 그릇을 갖추었던 것 같다.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탁고했으나 심신(心神-마음)에 두 갈래가 없었으니 실로 군신(君臣)의 지공(至公-지극히 공정함)함은 고금의 성궤(盛軌-아름다운 본보기)다. 기권(機權-기지와 임기응변), 간략(幹略-재능과 모략)은 위무제에는 미치지 못해 이 때문에 그 영토는 협소했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헤아리고, 오로지 이익만을 다투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려 했다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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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선주) -2
조공이 남쪽으로 유표를 정벌하자 때마침 유표가 죽고 아들인 유종(劉琮)이 그를 대신해 서고,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선주는 번(樊)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공이 졸지에 당도한 것을 몰랐다. (조공의 군이) 완(宛-남양군 완현)에 이르렀을 때야 이를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양양을 지날 때 제갈량이 선주를 설득하기를, 유종을 공격해 형주를 차지하라고 했다. 선주가 말했다,
당양(當陽-형주 남군 당양현)에 도착했을 무렵 그 무리가 십여 만에 이르고 치중(輜重-짐수레)이 수천 량(兩)으로 하루에 10여 리 밖에 가지 못하자, 별도로 관우를 보내 배 수백 척을 타고 가서 강릉(江陵-남군 강릉현)에서 만나기로 했다.

손권은 주유(周瑜), 정보(程普)등 수군(水軍) 수만을 보내 선주와 힘을 합해, 조공과 적벽(赤壁)에서 싸워 이를 대파하고 그 주선(舟船-배)을 불태웠다.
선주는 오군(吳軍)과 함께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고, (조공의 군을) 추격해 남군(南郡)에 이르렀다. 이때 또한 질역(疾疫-역병)이 돌아 북군(北軍-조조군)에 사망자가 많자, 조공이 군을 이끌고 되돌아갔다.
손권은 사자를 보내 함께 촉(蜀)을 취하자고 했다. 어떤 이가 의당 청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하며 오(吳)는 끝내 형(荊) 땅을 넘어 촉을 소유할 수 없으니 촉 땅은 가히 우리가 차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장송이 선주와 법정에게 서신을 보냈다,
진군하여 성도(成都-촉군 성도현)를 포위한 지 수십 일 만에 유장이 성을 나와 항복했다.
촉이 부유하고 풍성하니 선주는 주연을 베풀어 사졸들을 크게 대접하고 촉성(蜀城) 중의 금은을 취해 제장들에게 나누어주고 곡식과 비단은 되돌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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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선주) -1
선주(先主)는 성이 유(劉), 휘가 비(備)이고, 자(字)는 현덕(玄德)이다. 탁군(涿郡) 탁현(涿縣) 사람으로, 한(漢) 경제(景帝)의 아들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예이다

선주(先主)의 조부 유웅(劉雄), 부친 유홍(劉弘)은 대대로 주군(州郡,중앙이 아닌 지역을 뜻하는듯)에서 복무했다. 유웅은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동군범령(東郡范令-연주 동군 범현의 현령)에 이르렀다.
선주(先主-유비)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친과 함께 신발을 팔고 자리 엮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집 남동쪽 모퉁이 울타리 위에 뽕나무가 높이 자라 다섯 장(丈) 남짓 되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잎과 가지가 무성하여 마치 거개(車蓋-수레덮개)
처럼 보였다.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이 나무를 괴이하고 범상치 않게 여겼으며, 어떤 이는 이 집에서 응당 귀인(貴人)이 나올 것이라 했다
독우(督郵-군郡의 감찰관) 가 공적인 일로 (안희)현에 도착했다. 선주가 그를 만나기를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곧바로 들어가 독우를 묶고 장(杖) 2백 대를 때렸다. 그리고 인끈을 풀어 그의 목에 걸고는 그를 말뚝(馬枊)에 묶어두고 관직을 버린 채 달아났다.
얼마 후 대장군 하진(何進)이 도위(都尉) 관구의(毌丘毅)를 보내 단양(丹楊)으로 가서 모병하게 했다. 선주가 그와 함께 행동하다가 하비(下邳)에 이르러 적(賊)을 만났는데, 힘써 싸워 공을 세우고 하밀승(下密丞-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다. 다시 관직을 버렸다. 그 뒤 고당위(高唐尉-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었다가 (고당현)령으로 승진했다
현이 적(賊)에게 격파되자 중랑장 공손찬에게로 달아났다. 공손찬은 표를 올려 (선주를) 별부사마(장군 밑에 사마중에 따라 수하를 둘수있음)로 삼고, 청주자사 전해(田楷)와 함께 기주목 원소(袁紹)를 막도록 했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자 잠시 평원령(平原令-평원국 평원현의 현령)을 맡고 그 뒤 평원상(平原相-평원국의 국상. 태수급)을 겸했다
군민(郡民)인 유평(劉平)이 평소 선주를 깔보며 그 아래에 있음을 수치스러워 하여, 객(客-문객, 노객)을 보내 선주를 찔러 죽이게 했다. 객(客)이 차마 찌르지 못하고 그 일을 털어놓고 떠나니, 그가 인심을 얻은 것이 이와 같았다.
원술이 와서 선주를 공격하자 선주는 우이(盱眙-하비국 우이현.=盱台), 회음(淮陰-하비국 회음현)에서 이를 막았다. 조공(曹公-조조)이 표를 올려 선주를 진동장군(갖가지 명목의 잡호장군으로 장관과 비슷한 직위)으로 삼고 의성정후(宜城亭侯)에 봉하니, 이 해가 건안 원년(196년)이다.
마침내 동승, 장수교위(황궁 경호부대무관) 충집(种輯), 장군 오자란(吳子蘭), 왕자복(王子服-후한서에 의하면 왕복王服)등과 함께 공모했는데, 때마침 원술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어 실행하지 못했다. 일이 발각되어 동승 등이 모두 복주(伏誅-처형)되었다.
선주가 하비를 점거하고, 주령 등은 되돌아왔다. 이에 선주는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죽이고, 관우를 남겨 하비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왔다
조공은 그 군사들을 모두 거두고 선주의 처자를 붙잡고, 아울러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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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루팡들에서 벗어나기
어느덧 전기 양중팀에 들어온지 2달이 다 되어가고
요샌 공수도 많이 나오고 잡일도 많아져서 월급 루팡들이 많아졌다
사람이란 존재가 얼마나 얄팍하고 한없이 가볍기는 하지만
자기들 스스로가 자기 몫을 해주지 못하고 월급루팡 모드로 눈치만 보며 비겁하게 사는거 보면
참 안타깝다 생각이 들면서 저런 사람과는 사귀면 안되겠다라는 교훈을 준다
내가 처음 들어오고 30대에 한 반장님은 항상 열심히 많은 일을 하였는대
난 처음 그것을 이해를 못했다
왜 그냥 다 같이 쉬엄 쉬엄하면 되지 저렇게 열정적으로 혼자 할러고 하지?
요새 하두 월급루팡에 치이다보니
그 행동에는 이게 답일러나는 생각이 들었다
어짜피 월급루팡들 신경써봤자 스트레스만 받고 내 할일을 열심히 하자
아직 그 반장님이랑 그 행동에 이유를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럴꺼 같다 :)
나도 그 형들처럼 야비한 월급루팡이 되기전에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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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른업체 미리 구해놓고 퇴사할껄! (0) | 2022.12.08 |
돈의 속성 중요내용-5

- 돈 마다 품성이 다르며 가능하면 품질(시간과 바꾼 노동이나 사업)이 좋은 돈을 모아야 좋다
- 가족 내에서 부자가 됬을때 아직 규모가 작으면 지출도 작게하고 가족을 흩어지지 않게 하기 50억원쯤 되면 어느정도 가족내 지원해도 된다 100억이 넘었다면 많이 베풀고 가족 내 보험이 되어야한다
- 실패할 권리 - 실패는 두려워하지말고 그것으로 성장하면 된고 다시 도전하면 성공은 따라 올것이다
- 책으로 지식을 얻고 또 그 잘못된 책이 있다면 그것이 맞는 말인가인지도 보아야한다
- 신은 세상에 관여하지 않으므로 공평하다 , 그러므로 자신 스스로 일어나자
- 이익의 적정부분만 투자하자, 경영을 어느정도 할줄 알아야한다
- 좋은 동업자와 동업을 위해 문서와 공증이 완벽하게 하면 동업해도 된다
- 길을 모를땐 큰길로 간다 - 주식 1등 기업 or 부동산 큰길내 부동산등등 - 리스크적고 수익적음
- 쿼터법칙을 이용해서 타인과 비슷한 자산을 가진 사람의 1/4 의기준점을 가지면서 소비하면서 산다
- 부자는 노력 지혜 기회 운이 합쳐져 이뤄진다
- 결정을 방향과 속도 - 재산을 모을땐 농부처럼 투자할땐 어디든 돈이 될만할 곳에 신속하게 어부가 된다 그리고 위기가 올때 대비를 하고 어떤 기회가 생길때는 빠른 실행력을 보여준다
- 일어나자 기지개를 펴라 근육을 풀어주고 기를 받는다 , 잠자리 정리하면서 감사함을 느낀다 , 공복에 물한잔을 마시자 몸을 상쾌하게 해줌 , 일정한 시간에 자고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라 -신용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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