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위무제 -3
초평 3년(192년) 봄, 태조가 돈구(頓丘-동군 돈구현)에 주둔하자 우독(전편 흑산적) 등이 동무양을 공격했다. 이에 태조가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산으로 들어가 우독 등의 본둔(本屯-본영)을 공격했다
우독 등이 이 일을 듣고 (동)무양을 버리고 되돌아왔다. 태조는 수고(휴고)를 요격(要擊-도중에서 차단하여 공격함)하고 또한 흉노 어부라(於夫羅)를 내황(內黃-위군 내황현)에서 공격해 모두 대파했다
여름 4월, 사도 왕윤(王允)이 여포와 함께 동탁을 죽였다. 동탁의 장수 이각(李傕), 곽사(郭汜) 등이 왕윤을 죽이고 여포를 공격했다. 여포는 싸움에 져 동쪽으로 달아나 무관(武關)을 벗어났다. 이각 등이 조정을 농단했다.
청주 황건의 무리들 백만 명이 연주로 들어와 임성상(任城相-연주 임성국의 국상=태수) 정수(鄭遂)를 죽이고 진로를 돌려 동평(東平-연주 동평국)으로 들어왔다. 유대(劉岱)가 이를 공격하려 하자 포신(鮑信)이 간언했다,
이에 포신은 주리(州吏-주의 관리) 만잠(萬潛) 등과 함께 동군으로 가서 태조를 맞이해 연주목을 겸하게 했다. 그리고는 진병하여 수장(壽張-동평국 수장현) 동쪽에서 황건적을 공격했다. 포신은 힘써 싸우다 전투 중에 죽었고 가까스로 이들을 격파했다
포신의 시체를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자 사람들은 나무를 깎아 포신의 형상처럼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곡(哭)을 했다. 황건적을 추격해 제북(濟北-연주 제북국)에 도착하자 (황건적들이) 항복을 청했다.
초평 4년(193년) 봄, 견성(鄄城- 연주 제음군 견성현)에 주둔했다. 형주목 유표(劉表)가 원술의 양도(糧道-군량 수송로)를 끊자 원술이 군을 이끌고 진류로 들어와 봉구(封丘-진류군 봉구현)에 주둔하고, 흑산적의 남은 무리와 어부라 등이 그를 도왔다. 원술은 장수 유상(劉詳)을 광정(匡亭)에 주둔하게 했다.
태조가 유상을 공격하자 원술이 그를 구원하니 더불어 싸워 대파했다. 원술은 봉구(封丘)로 물러나 지켰고 이에 봉구를 포위했는데 맞붙어 싸우기도 전에 원술은 양읍(襄邑-진류군 양읍현)으로 달아났다. 이를 추격하여 태수(太壽)에 당도하자 수로의 물을 터뜨려 성에 물을 끌어들였다. (원술은) 영릉(寧陵-예주 양국 영릉현)으로 달아났고 또다시 추격하자 구강(九江-양주 구강군)으로 달아났다.
여름, 태조가 정도(定陶-제음군 정도현)로 환군했다.
하비의 궐선(闕宣)이 무리 수천 명을 모으고 천자(天子)를 자칭했다. 서주목 도겸(陶謙)은 그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태산군의 화(華)현, 비(費)현을 차지하고 임성(任城)을 공략했다.
가을, 태조가 도겸을 정벌해 10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도겸은 성을 지킬 뿐 감히 나오지 못했다.
여름, 순욱(荀彧), 정욱(程昱)에게 견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도겸을 정벌하여 다섯 성(城)을 함락시키니 공략한 땅이 동해(東海-서주 동해군)에까지 이르렀다. 돌아오는 길에 담(郯-동해군 담현)을 지나는데 도겸의 장수 조표(曹豹)가 유비와 함께 담(郯) 동쪽에서 태조를 요격했다. 태조가 이를 격파하고 마침내 양분(襄賁-동해군 양분현)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지나는 길에 잔륙(殘戮-살륙)한 곳이 많았다
때마침 장막(張邈)이 진궁(陳宮)과 함께 여포(呂布)를 맞아들이자 군현들이 모두 호응했다. 순욱과 정욱은 견성을 보전하고 범(范-동군 범현), 동아(東阿-동군 동아현) 2현을 굳게 지키니 이에 태조가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여포가 당도하여 견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서쪽으로 가서 복양(濮陽)에 주둔했다.
“여포가 하루아침에 한 주(州)를 얻었으나, 동평(東平-연주 동평국)을 점거하고 항보(亢父-연주 임성국 항보현)와 태산의 길을 끊은 채 험지에서 나를 요격하지 못하고 복양에 주둔했으니, 나는 그가 할 수 있는 바가 없음을 알겠다.”
태조가 진군해서 복양을 포위해 여포를 공격했는데, 전씨가 내통해서 태조는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태조는 동문을 불태워 돌아갈 뜻이 없음을 보였지만 여포도 출병해 싸우면서 기병으로 청주병을 공격하면서 청주병이 달아나자 태조의 진영이 혼란에 빠져 패하게 되었다.
여포의 기병이 태조를 붙잡았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조조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가 노란 말을 타고 달아나는 자가 조조라고 말해 위기에 벗어났는데, 태조가 말을 달려 불길이 있는 동문을 벗어나다가 말에서 떨어져 왼쪽 손바닥에 화상을 입었다. 이 때 사마였던 누이는 태조를 부축해 말에 오르게 해 이끌고 빠져나왔다.
(태조가) 둔영에 도착하기 전 제장들은 태조가 보이지 않자 모두 두려워했다. 이에 태조가 친히 군사들을 위로하고 군중에 영을 내려 속히 공구(攻具-공성 무기)를 만들도록 했다. 그리고 다시 여포를 공격하여 백여 일 동안 서로 대치했다. 황충(蝗蟲-메뚜기)이 일어 백성들이 크게 굶주리고 여포의 양식 또한 소진되니 각각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흥평 2년(195년) 봄, 정도(定陶-제음군 정도현)를 습격했다. 제음태수 오자(吳資)가 남성(南城)을 지키니 함락시키지 못했다.때마침 여포가 도착하자 또한 여포를 공격하여 깨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