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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여포의 장수 설란(薛蘭), 이봉(李封)이 거야(鉅野-연주 산양군 거야현)에 주둔했다. 태조가 이를 공격하자 여포가 설란을 구원했는데, 설란은 패하자 여포는 달아났고 마침내 설란 등을 참수했다. 
 여포는 다시 동민(東緡-산양군 동민현)에서부터 진궁과 함께 만여 명을 이끌고 와서 싸웠다. 이때 태조의 군사들이 적었는데 복병을 설치하고 기병(奇兵-기습부대)을 풀어 공격하여 이를 대파하니 여포는 밤중에 달아났다. 
태조는 다시 정도(定陶)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군을 나누어 여러 현들을 평정했다. 여포는 동쪽으로 유비에게로 달아났는데, 장막은 여포를 뒤따르면서 동생인 장초(張超)에게 가속들을 이끌고 옹구(雍丘-진류군 옹구현)를 보전하도록 했다.
가을 8월, 옹구를 포위했다. 
겨울 10월, 천자가 태조를 연주목(兗州牧)으로 임명했다.
12월, 옹구가 무너지고 장초는 자살하였고 장막의 삼족을 멸했다. 장막은 원술에게로 가서 구원을 청하려다 그의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태조는 연주가 평정되자 동쪽으로 진(陳-예주 진국)의 땅을 공략했다. 
 이 해 장안에 난이 일어나 천자가 동천(낙양으로 천도)하려했으나. 호위군이 조양(曹陽)에서 (이각군에게) 패하자 황하를 건너 안읍(安邑)으로 행차했다.
 건안 원년(196년) 봄 정월, 태조군이 무평(武平-예주 진국 무평현)에 임하자 원술이 임명한 진상(陳相-진국의 국상) 원사(袁嗣)가 항복했다. 
 태조가 장차 천자를 영접하려 하자 제장들 중에 간혹 의심하는(반대하는) 자가 있었으나, 순욱, 정욱이 권하자 조홍(曹洪)을 보내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천자를 영접하도록 했다. (그러나) 위장군(궁성의 수비와 황제호위) 동승(董承)이 원술의 장수 장노(萇奴)와 함께 험준한 곳을 막고 있었으므로 조홍은 진군할 수 없었다.

 여남과 영천의 황건적 하의(何儀), 유벽(劉辟), 황소(黃邵), 하만(何曼) 등은 각각 그 무리가 수만에 이르렀는데, 처음에 원술에 호응했다가 다시 손견에 붙었었다. 2월, 태조가 진군하여 이를 정벌하고 유벽, 황소 등을 참수하자 하의의 무리가 모두 투항했다. 천자가 태조를 건덕장군(정벌을 담당하는 잡호장군)으로 임명했다.

여름 6월, 진동장군(반란진압 업무)으로 승진하고 비정후(비정쪽 제후인듯)에 봉해졌다. 

 가을 7월, 양봉(楊奉), 한섬(韓暹)이 천자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왔고, 양봉은 따로 양(梁-사례 하남윤 양현)에 주둔했다. 

마침내 태조가 낙양에 당도해 경도(京都)를 호위하자 한섬은 달아났다. 천자가 태조에게 절월(도끼류로 권한을 줄때 줌)을 내리고 녹상서사(궁정의 문서를 맡던 관직, 내각총리같음)로 삼았다. 

낙양이 잔파(잔인하게 부서짐)되었으므로 동소(董昭) 등은 태조에게 허(許-예주 영천군 허현)에 도읍할 것을 권했다. 

 9월, 천자가 환원(轘轅)을 나와 동쪽으로 갔다. 태조를 대장군(병마의 대권을 관장한 최고의 무관직)으로 삼고 무평후(무평의 제후작위?)에 봉했다. 천자가 서쪽으로 천도한 이래 조정이 날로 어지러워지다 이때에 이르러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제도가 비로소 바로 세워졌다.
 
 
천자가 동쪽으로 향하자 양봉은 양(梁)현에서부터 이를 요격하려 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겨울 10월, 공(公-조조. 쭉 태조로 호칭하다가 헌제를 영접한 이때부터 공公으로 표기)이 양봉을 정벌하니 양봉은 남쪽으로 원술에게로 달아났고 마침내 양봉의 양(梁)현에 있던 둔영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원소는 태위(삼공중에 하나로 주로 군사담당)에 임명되자 그 반열이 공(公-조조)의 아래에 있음을 수치로 여겨 직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공(公)이 대장군 직을 고사(固辭-굳게 사양함)하고 원소에게 양보했다. 천자가 공(公)을 사공(삼공중 하나로 주로 토목과 관개를 담당)과 함께 거기장군(대장군 밑 7장군중에 2번쨰)에 임명했다. 
 
 
이 해, 조지(棗祗), 한호(韓浩) 등의 의견을 채용해 처음으로 둔전(屯田,둔전은 병사들로 하여금 땅을 경작하게 하여 군량을 만드는것)을 일으켰다
여포가 유비를 습격하여 하비를 차지하자 유비는 달아나 공에게로 왔다. 정욱(程昱)이 공(公)을 설득하며 말했다, 
“살펴보건대 유비는 웅재(雄才)가 있고 민심을 크게 얻었으니 끝내 남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빨리 도모하는 것이 낫습니다.” 
공(公)이 말했다, 
“이제 바야흐로 영웅들을 거두어들일 때인데, 한 사람을 죽이고 천하인의 마음을 잃는 것이니 불가하오.” 
장제(張濟)가 관중(關中)에서 남양(南陽)으로 달아났다. 장제가 죽자 그 종자(從子-조카)인 장수(張繡)가 그 무리를 거느렸다. 

2년(197) 봄 정월, 공(公)이 완(宛-형주 남양군 완현)에 이르자 장수가 항복했는데 그 뒤 이를 후회하여 다시 모반했다. 공(公)이 더불어 싸웠으나 군이 패하고 날아온 화살에 맞았고, 장자(長子-큰 아들) 조앙(曹昂), 제자(弟子-동생의 아들. 즉 조카) 조안민(曹安民)이 해를 입었다

이에 공은 군을 이끌고 무음(舞陰-남양군 무음현)으로 돌아갔는데, 장수가 기병을 이끌고 와서 노략질하자 공이 이를 격파했다. 장수는 양(穰-남양군 양현)으로 달아나 유표와 합쳤다. 
 공(公)이 제장들에게 말했다, 
“내가 장수 등을 항복시켰으나 실수로 인질을 잡아 두지 않아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소. 내가 패한 이유를 알만 하오. 제경(諸卿)들은 이를 잘 살펴 지금 이후로 다시 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그리고 허도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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