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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7월, 공이 손권을 정벌했다.

이전에 농서(양주지방)의 송건(宋建)이 하수평한왕(河首平漢王)을 자칭하고 부한(枹罕-양주 농서군 부한현)에서 무리를 끌어모아 연호를 고치고 백관(관직)을 둔지 30여 년이 흘렀다. 흥국(興國)에 있던 하우연이 이를 토벌하게 했다. 

 
겨울 10월, 부한을 함락하고 송건을 참수하니 양주(涼州)가 평정되었다.
 
공이 합비로부터 돌아왔다.
 
11월, 한(漢) 황후 복씨(伏氏)가 부친인 전 둔기교위(5교위 중 하나로 도성 치안담당) 복완(伏完)에게 예전에 보낸 서신에서 ‘황제가 동승(董承)이 주살된 일 때문에 공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고 했는데 그 언사가 심히 추악하여 발각되자 폐황후가되어 죽고 그 형제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12월, 공이 맹진(하내 근처)에 이르렀다. 천자가 공에게 명해 모두(旄頭-황제의 의장행렬 선두에 세우던 소꼬리 털로 장식한 깃발)를 두게 하고 궁전에 종거(鍾虡-종을 매다는 틀)를 설치하게 했다. 
 
을미일, 영을 내렸다 (※ 거사령 擧士令 or 칙유사취사무폐편단령 敕有司取士毋廢偏短令)
 
- 무릇 품행이 뛰어난 선비(有行之士)가 반드시 진취(進取-적극적으로 나아가 일을 이룩함)하는 것이 아니며 진취한 선비가 반드시 품행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진평(陳平)이 어찌 독실하게 처신한 인물이며 소진(蘇秦)이 어찌 신의를 지킨 인물이란 말인가? 그러나 진평은 한(漢)의 대업을 정했고 소진은 미약한 연(燕)나라를 구했으니, 이로써 말한다면 선비가 편단(偏短-한쪽으로 치우친 단점)이 있다 하여 어찌 폐(廢)하겠는가! 유사(有司-담당관원)들은 이 뜻을 밝게 생각해 선비가 유체(遺滯-인재가 발탁되지 않고 방치됨)되는 일이 없도록 하고, 관에서는 그 업을 폐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또 말했다 (※ 신형령 愼刑令 or 선군중전옥령 選軍中典獄令)
 
- 무릇 형(刑)이란 것은 백성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그러나 군중에서 옥(獄)을 관장하는 자 중에는 혹 그 사람됨이 아닌 자가 있어 그에게 삼군의 생사에 걸린 일을 맡기니 나는 이점을 심히 근심스럽다. 법리(法理)에 밝게 통달한 자를 뽑아 그로 하여금 형(刑)을 관장하게 하라.
 
이에 이조(승상부의 부속기구로 안건을심의) 연속(도와주는 속관?)을 두었다.
 
20년(215) 봄 정월, 천자가 공의 둘째 딸을 황후(皇后)로 세웠다. 운중(雲中), 정양(定襄), 오원(五原), 삭방군(朔方郡)을 없애고 그 군들에 (각각) 1현을 두어 백성들을 거느리게 하고 이를 합쳐서 신흥군(新興郡)을 설치했다. (※ ex. 운중군 → 신흥군 운중현)
 
3월, 공이 서쪽으로 장로(張魯)를 정벌해 진창(陳倉)에 이르렀는데, 장차 무도(武都)로부터 저(氐)로 들어가려 했다. 저인(氐人)들이 길을 막자 먼저 장합(張郃), 주령(朱靈) 등을 보내 공파(공격하여 파함)했다. 
 
여름 4월, 공이 진창으로부터 산관(散關)을 나와 하지(河池)에 도착했다. 저왕(氐王-저족의 왕) 두무(竇茂)의 군사 만여 명이 험한 지세에 의지한 채 복종하지 않았다.
 
5월, 공이 이를 공격해 무찔렀다. 서평(西平), 금성(金城)의 제장들인 국연(麴演), 장석(蔣石) 등이 함께 한수(韓遂)의 수급을 베어 보내왔다.
가을 7월, 공이 양평(陽平)에 이르렀다. 장로(張魯)는 동생 장위(張衛)와 장수 양앙(楊昂) 등을 시켜 양평관(陽平關)을 점거하게 하고, 산을 가로질러 10여 리에 걸쳐 성을 쌓았는데, 이를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적은 대군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그 수비가 흐트러졌다. 이에 공이 은밀히 해표(解剽), 고조(高祚) 등을 보내 험한 곳을 오르도록 해 야습하여 대파하고 그 장수인 양임(楊任)을 참수했다. 진격하여 장위를 공격하자 장위 등은 밤중에 달아나고 장로는 무너져 파중(파서)으로 달아났다. 
 공의 군대가 남정(한중 중앙 밑)으로 들어가 장로의 부고(창고)에 있던 진보(珍寶-진기한 보물)를 모두 얻었고,  파(파군), 한(한군)이 모두 항복했다. 

한녕군(漢寧郡)을 한중군(漢中郡)으로 다시 되돌렸다. 한중의 안양(安陽), 서성(西城)현을 갈라 서성군(西城郡)을 설치하고 태수를 두었다. 석(錫)현과 상용(上庸)현을 갈라 상용군(上庸郡)을 설치하고 도위(都尉)를 두었다.

8월, 손권이 합비(合肥)를 포위하자 장료(張遼), 이전(李典)이 이를 격파했다.
 9월 파군(巴郡)의 7성(7왕)의 이왕(夷王) 박호(朴胡), 종읍후(賨邑侯) 두호(杜濩)가 파군의 이(夷)족, 종민(賨民- 이민족의 일종)을 들어 귀순시켰다. 

이에 파군을 나누어 박호를 파동(巴東)태수로, 두호(巴西)를 파서태수로 삼고, 모두 열후에 봉했다. 천자가 공에게 명해 승제(承制-천자의 명을 받들어 그 권한을 편의로 행사함)하여 제후(諸侯), 수상(守相-군의 태수와 국의 상)을 봉배(封拜)할 수 있도록 했다

겨울 10월, 처음으로 명호후(名號侯)에서 오대부(五大夫)에 이르는 작위를 두고, 예전의 열후, 관내후와 더불어 모두 6등(등급)으로 군공(싸움의 공로)을 포상했다

11월, 장로(張魯)가 파중(巴中)으로부터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와서 항복했다. 장로와 그 다섯 아들을 모두 열후에 봉했다. 
 
유비가 유장(劉璋)을 습격해 익주(益州)를 차지하고 마침내 파중을 점거했다. 장합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다.
 
12월, 공이 남정(南鄭)으로부터 돌아오며, 하후연을 남겨 한중에 주둔하게 했다. 
 

21년(216) 봄 2월, 공이 업으로 돌아왔다

3월 임인일, 공이 친히 적전(왕의 농사의 본보기용 토지)을 갈았다.

여름 5월, 천자가 공의 작위를 올려 위왕(魏王)으로 삼았다.

 대군(代郡)의 오환 행(行-대행의 의미) 선우 보부로(普富盧)와 그의 후왕(제후왕)이 내조(來朝-와서 조알함)했다. 천자가 명해 왕(王-조조)의 딸을 공주(公主)로 삼고 탕목읍(湯沐邑)을 식읍으로 주었다. 

 
가을 7월, 흉노 남선우 호주천(呼廚泉)이 그의 명왕(이름있는 왕?)을 거느리고 내조(來朝)하자 그를 빈객의 예의로 대우하니 마침내 (호주천은) 위나라에 남아 머물며 우현왕 거비(去卑)로 하여금 그 나라를 감독하게 했다. 
 
8월, 대리(大理) 종요(鍾繇)를 상국(승상=상국,최고 행정관)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군사들을 조련하고  마침내 손권(孫權)을 정벌하여 11월, 초(譙)에 이르렀다.
 
22년(217년) 봄 정월, 왕이 거소(居巢)에 주둔했다. 
 
2월, 진군하여 장강 서쪽의 학계(郝谿)에 주둔했다. 손권은 유수구(濡須口)에 있으면서 성을 쌓아 거수(拒守-막아서 지킴)했는데, 마침내 이를 핍박해 공격하니 손권이 퇴주(退走)했다. 
 
3월, 왕이 군을 이끌고 돌아오며 하후돈(夏侯惇), 조인(曹仁), 장료(張遼) 등을 남겨 거소에 주둔하게 했다.
 
여름 4월, 천자가 왕에게 명해 천자의 정기(旌旗-깃발)를 세우게 하고, 출입할 때 경필(警蹕-제왕이 거동할 때 행인을 금하고 도로를 치워 경계하는 것)을 하도록 허락했다 
 
5월, 반궁(泮宮-제후가 설치한 학교)을 지었다. 
 
6월, 군사(軍師) 화흠(華歆)을 어사대부(관리감찰 및 황제비서)로 임명했다.
 
  
겨울 10월, 천자가 왕에게 명해 면류관에 12줄의 류(旒-면류관의 앞뒤에 드리운 주옥을 꿴 술. 천자가 12류)를 달도록 하고, 금근거(금으로 장식한 수례)를 타며 6필의 말이 끌게 하고 오시부거(五時副車-계절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수행수레)를 두게 했다. 오관중랑장(궁중지킴) 조비(曹丕)를 위(魏) 태자(太子)로 삼았다.
 
유비가 장비(張飛), 마초(馬超), 오란(吳蘭) 등을 보내 하변(무도)에 주둔하게 하니, 조홍을 보내 이에 맞서게 했다.
 
23년(218) 봄 정월, 한(漢) 태의령(의원 관리) 길본(吉本)이 소부(황궁의 물건 담당) 경기(耿紀), 사직(허창 주위 관원들 관리) 위황(韋晃)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허도를 공격하고 승상장사(승상부 속관) 왕필(王必)의 둔영을 불을 질렀다. 
 
왕필은 영천(예주)의 전농중랑장(둔전 관리) 엄광(嚴匡)과 함께 이들을 토벌해 참수했다.
 
조홍이 오란(吳蘭)을 격파하고 그 장수 임기(任蘷) 등을 참수했다. 
 
3월, 장비,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고, 음평(陰平)의 저(氐)족 강단(強端)이 오란을 참수해 그 수급을 보내왔다.
 
여름 4월, 대군(代郡), 상곡(上谷)의 오환 무신저(無臣氐)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언릉후(鄢陵侯) 조창(曹彰)을 보내 이를 토벌하여 격파하게 했다.

6월, 영을 내렸다.

 
 “옛날에 장사지낼 때는 반드시 척박한 땅에 묻었다. 서문표(西門豹-전국시대 위魏나라 정치가. 업령鄴令을 지냄)의 사당 서쪽 들판 위를 수릉(생전에 만든묘)으로 하여 그 높은 곳에 터를 잡고 봉분을 만들지 말고 나무도 심지 말라. 주례(옛날 책)에서는 총인(묘지기)이 공(公)의 묘지를 관장하고 무릇 제후(의 무덤)를 좌우의 앞에, 경대부는 뒤에 둔다고 했고, 한나라 제도에서 또한 이를 배릉(陪陵)이라 일컬었다. 공경(公卿) 대신(大臣) 열장(列將)들 중 공이 있는 자는 마땅히 수릉(壽陵)을 배종하도록 하고(자신의 무덤 옆에 배릉으로 안장하라는 말) 그 크기를 넓게 잡아 조역(兆域-묘역)으로 삼기에 족하도록 하라.”
 
가을 7월, 군사를 조련하고 마침내 서쪽으로 유비를 정벌했다. 
 
9월, 장안에 이르렀다.
 
겨울 10월, 완(宛)의 수장(경비대장?) 후음(侯音) 등이 반란을 일으켜 남양태수를 붙잡고 관원과 백성들을 겁략(劫略)하여 완을 지켰다. 당초 조인(曹仁)이 관우(關羽)를 토벌하기 위해 번성(樊城)에 주둔했었는데 이 달에 조인에게 완을 포위하게 했다.
 
24년(219) 봄 정월, 조인이 완을 함락하고 후음을 참수했다. 
 
하후연이 양평(한중)에서 유비와 싸우다 유비에게 죽임을 당했다. 
 
3월, 왕이 장안으로부터 야곡(斜谷)을 나왔는데, 조조군(王)이 요지를 차단하며 한중에 임하여 마침내 양평에 도착했다. 유비는 험지에 의지해 거수(拒守-막아서 지킴)했다
여름 5월, 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가을 7월, 부인 변씨(卞氏)를 왕후(王后)로 세웠다.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曹仁)을 도와 관우(關羽)를 공격하게 했다. 
 
8월, 한수(漢水)가 범람해 우금군에 물이 흘러들어 군이 수몰했다. 관우가 우금을 사로잡고는 이에 조인을 포위했다. 서황(徐晃)에게 조인을 구원하게 했다.
 
9월, 상국(相國) 종요(鍾繇)가 서조연(西曹掾-승상 또는 상국의 속관으로 관리 선발) 위풍(魏諷)의 반란에 연좌되어 면직되었다.

겨울 10월, 군(軍)이 낙양으로 돌아왔다.

손권이 사자를 보내 상서(상주문을 올림)하여, 관우를 토벌하는데 자효(自效-스스로 힘을 다해 노력함)할 것이라 했다. 왕이 낙양으로부터 남쪽으로 관우를 정벌했다. 미처 이르기 전에 서황이 관우를 격파하고 관우는 달아나니 조인에 대한 포위가 풀렸다. 왕이 마피(하남쪽)에 주둔했다.

25년(220) 봄 정월, 낙양에 이르렀다. 손권이 관우를 공격해 참수하여 그 수급을 보내왔다.
 
경자일, 왕이 낙양에서 붕(崩-천자의 죽음. 崩>薨)하니 그때 나이 66세였다

다음과 같은 영을 남겼다,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못해 옛 법을 따를 수 없으니 장례가 끝나면 모두 상복을 벗도록 하라. 군을 이끌고 둔수(수비진에 주둔)하는 자는 그 둔부(진지)를 떠나지 말고 유사(담당관리)들은 각자 직임을 다하라. 평상복으로 염(시체를 쌀때)하고 금옥진보(금은보화)를 묻지 말라.” 
 
시호를 무왕(武王)이라 했다. 
 
2월 정묘일, 고릉(高陵)에 장사지냈다
 
평한다 ― 한나라 말 천하에 대란이 일어 영웅호걸들이 아울러 봉기하니, 원소가 4주(四州)에서 호시(虎視-범처럼 노려봄)함에 강성하여 대적할 자가 없었으나, 태조가 주략과 지모를 내어 우내(宇內-천하)를 편달(鞭撻-독려)했다.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의 법술(法術)을 취하고 한신(韓信)과 백기(白起)의 기책(奇策)을 갖추었고, 관직은 재능에 따라 수여하되 각각 그 그릇에 맞게 썼으며,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하고 냉정한 계산에 임해(矯情任算) 옛 허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침내 황기(皇機-황제의 정무)를 능히 총람(總禦)하고 홍업(洪業-대업)을 이루어낸 것은 그의 밝은 지략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니, 가히 비상(非常)한 인물로 초세지걸(시대를 넘어서는 영웅)이라 이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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