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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표가 선주에게) 하후돈(夏侯惇), 우금(于禁) 등을 박망(博望-남양군 박망현)에서 막게 했다. 얼마 뒤, 선주는 복병(伏兵)을 두고 하루아침에 스스로 둔영을 불사르고 거짓으로 달아났는데, 하후돈 등이 이를 추격하다 복병에 의해 격파되었다. 
건안 12년 (207년), 조공이 북쪽으로 오환(烏丸)을 정벌하자 선주는 유표에게 허도를 습격하도록 설득했으나 유표는 이 계책을 쓰지 않았다.

조공이 남쪽으로 유표를 정벌하자 때마침 유표가 죽고 아들인 유종(劉琮)이 그를 대신해 서고,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선주는 번(樊)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공이 졸지에 당도한 것을 몰랐다. (조공의 군이) 완(宛-남양군 완현)에 이르렀을 때야 이를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양양을 지날 때 제갈량이 선주를 설득하기를, 유종을 공격해 형주를 차지하라고 했다. 선주가 말했다,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소.”
 이에 말을 멈추고 유종을 부르자 유종이 두려워하며 일어나지 못했다. 유종의 좌우(左右-주변인, 측근)와 형주인들 다수가 선주에게 귀부했다.

당양(當陽-형주 남군 당양현)에 도착했을 무렵 그 무리가 십여 만에 이르고 치중(輜重-짐수레)이 수천 량(兩)으로 하루에 10여 리 밖에 가지 못하자, 별도로 관우를 보내 배 수백 척을 타고 가서 강릉(江陵-남군 강릉현)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떤 이가 선주에게 말했다, 
 
“의당 신속히 행군해 강릉을 보전해야 합니다. 지금 비록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있으나 갑옷을 입은 자는 적으니, 만약 조공의 군사가 도착한다면 이를 어찌 막으려 하십니까?” 
 
선주가 말했다, 
 
“무릇 큰일을 이룰 때는 필히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법이오. 지금 사람들이 내게 귀부하는데 내가 어찌 차마 버리고 떠나겠소!”

조공은 군비가 충실한 강릉을 선주가 먼저 점거하는 것을 두려워해, 치중(輜重)을 내버려두고 경군(輕軍-경병)으로 양양에 도착했다. 
 
선주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듣고 조공은 정기(精騎-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이를 추격했다.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달려 당양의 장판(長阪)에 이르렀다. 선주는 처자를 버리고 제갈량, 장비, 조운 등 수십 기를 이끌고 달아났고, 조공은 그의 무리들과 치중을 크게 노획했다. 
 
선주는 한진(漢津)을 비껴 달려가다 관우의 배를 만나 면수(沔水-한수)를 건널 수 있었고, 유표의 장자(長子)인 강하(江夏)태수 유기(劉琦)의 군사 만여 명을 만나 함께 하구(夏口-한수가 장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선주가 제갈량을 보내 손권과 결친했다.

손권은 주유(周瑜), 정보(程普)등 수군(水軍) 수만을 보내 선주와 힘을 합해, 조공과 적벽(赤壁)에서 싸워 이를 대파하고 그 주선(舟船-배)을 불태웠다.

선주는 오군(吳軍)과 함께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고, (조공의 군을) 추격해 남군(南郡)에 이르렀다. 이때 또한 질역(疾疫-역병)이 돌아 북군(北軍-조조군)에 사망자가 많자, 조공이 군을 이끌고 되돌아갔다.

선주는 표를 올려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고 또한 남쪽으로 4군(四郡)을 정벌했다. 무릉(武陵)태수 김선(金旋), 장사(長沙)태수 한현(韓玄), 계양(桂陽)태수 조범(趙範), 영릉(零陵)태수 유도(劉度)가 모두 항복했다.  여강(廬江)의 뇌서(雷緖)는 부곡 수만 명을 이끌고 계상(稽顙-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함. 투항함)했다. 
유기가 병들어 죽자 군하(群下-뭇 부하)들이 선주를 추대해 형주목으로 삼고 공안(公安,공공의 평온과 안전)을 다스렸다. 손권이 점차 이를 두려워해 여동생을 시집보내 우호를 굳건히 했다. 선주가 경(京-경구京口)에 이르러 손권을 만나고, 은기(恩紀-은정)를 주무(綢繆-끈끈히 얽어맴)했다. 

손권은 사자를 보내 함께 촉(蜀)을 취하자고 했다. 어떤 이가 의당 청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하며 오(吳)는 끝내 형(荊) 땅을 넘어 촉을 소유할 수 없으니 촉 땅은 가히 우리가 차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형주 주부(主簿) 은관(殷觀)이 진언했다, 
 
“만약 오(吳)의 선구(先驅-선두, 선봉)가 된다면, 나아가서는(進) 능히 촉을 이길 수 없고, 물러나서는(退) 오(吳)가 이를 틈탈 것이니 일이 어그러질 것입니다. 지금 다만 그들이 촉을 치는 것을 도와주는 것처럼 하되, 우리가 새로이 여러 군(郡)을 점거하여 군을 일으켜 움직일 수 없다고 하면, 필시 오(吳)는 감히 우리를 넘어 홀로 촉을 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퇴지계(進退之計나아가고 물러나는 전략)를 이처럼 하면 가히 오(吳), 촉(蜀)의 이익을 거둘 수 있습니다.” 
 
선주가 이에 따르자 손권은 과연 (촉을 칠) 계획을 그만두었다. 은관을 올려 별가종사(別駕從事 주목이나 자사의 중요 보좌관)로 삼았다.
 
건안 16년(211년), 익주목 유장(劉璋)은 조공이 장차 종요(鍾繇) 등을 보내 한중으로 향하여 장로(張魯)를 토벌한다는 것을 멀리서 듣고, 내심 두려움을 품게 되었다. 
 
별가종사 촉군(蜀郡)의 장송(張松)이 유장을 설득했다, 
 
"조공의 군사는 강하고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으니 만약 장로의 물자를 이용해 촉 땅을 취하려 한다면 누가 능히 막겠습니까?” 
 
유장이 말했다, 
 
“내가 이 일로 우려하고 있으나 아직 계책이 없소.” 
 
장송이 말했다,
 
“유예주(劉豫州)는 사군(使君)의 종실(宗室)이며 조공의 깊은 원수이고, 용병(用兵)을 잘하니 만약 그로 하여금 장로를 치게 한다면 필시 장로를 격파할 것입니다. 장로가 격파되면 익주가 강성해지니 비록 조공이 온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유장이 이를 옳게 여겼다. 법정(法正)을 보내 4천 명을 이끌고 선주를 맞도록 하고 앞뒤로 거억(巨億)의 선물을 보냈다. 이로 인해 법정은 (선주에게) 익주를 취할 계책을 진언했다.
 
선주는 제갈량, 관우 등을 남겨 형주를 지키게 하고는, 보졸(步卒-보병) 수만 명을 이끌고 익주로 들어갔다. 부(涪-익주 광한군 부현)에 이르러 유장이 몸소 나와 영접하니 서로 만나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장송이 법정을 통해 선주에게 고하고 아울러 모신(謀臣모사에 뛰어난 신하) 방통(龐統)이 진언하길, 만난 자리에서 유장을 습격하도록 권했다. 선주가 말했다, 
 
“이는 큰일이니 창졸간에 할 수 없소.” 
 
유장은 선주를 행 대사마, 영 사례교위(대사마-군대 지휘 와 영 내 사례교위-관리감찰,감독 직을 겸임)로 추천하고 선주는 또한 유장을 행 진서대장군, 영 익주목(진서대장군-반란진압 와 익주목을 겸임)으로 추천했다. 유장은 선주의 군사를 늘려주어 장로를 공격하도록 하고 또한 백수군(白水軍-백수는 광한군 백수현)을 지휘하도록 했다. 선주의 군사는 통틀어 3만여 명에, 수레, 갑옷, 기계, 물자가 매우 많았다. 
 
이 해, 유장은 성도로 돌아갔다. 선주는 북쪽으로 가맹(葭萌-광한군 가맹현)에 도착하고, 즉시 장로를 치지 않고 은덕을 후하게 베풀어 중심(衆心-민심)을 거두었다.
  
다음해(212년), 조공이 손권을 정벌하자 손권은 선주에게 구원을 청했다. 
선주가 사자를 보내 유장에게 고했다, 
“조공이 오(吳)를 정벌하니 오(吳)에서는 위급함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손씨(孫氏)와 고(孤-나)는 본래 순치(脣齒-입술과 이)의 관계입니다. 또한 악진(樂進)이 청니(靑泥)에서 관우와 서로 맞서고 있으니 지금 가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으면 악진이 필시 대승할 것이고, 그들이 군을 돌려 주(州)의 경계를 침범한다면 장로보다 더욱 심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장로는 스스로를 지키는 적이니 족히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 유장에게 군사 1만과 물자를 청하고 동쪽으로 가려고 했다. 유장은 다만 군사 4천을 허락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절반만을 주었다

장송이 선주와 법정에게 서신을 보냈다, 

 
“지금 대사가 거의 이루어지려 하는데, 어찌 이를 내버려두고 떠나려 하십니까!” 
 
장송의 형 광한태수 장숙(張肅)은 화(禍)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 그 모의를 유장에게 고했다. 이에 유장이 장송을 붙잡아 참수하자, (유비와 유장 사이에) 혐극(嫌隙-서로 싫어해 벌어진 틈)이 처음 생기게 되었다.
유장은 관문을 지키는 제장들에게 문서를 보내, 다시는 선주와 관통(關通-결탁하거나 내통함)하지 말도록 명했다.  
선주가 대노해 유장의 백수군독(白水軍督,백수군의 수장?) 양회(楊懷)를 불러 무례함을 질책하며 참수했다. 이에 황충(黃忠), 탁응(卓膺)을 시켜 군을 이끌고 유장에게 향하도록 했다. 선주는 곧바로 관(關) 안으로 들어가 제장, 사졸들의 처자를 인질로 잡고, 황충, 탁응과 함께 군을 이끌고 부(涪)현으로 진격해 그 성을 점거했다. 유장은 유괴(劉璝), 냉포(冷苞), 장임(張任), 등현(鄧賢) 등을 보내 부(涪)에서 선주를 막게 했으나  모두 격파되었고, 물러나 면죽(綿竹-광한군 면죽현)에 의지했다.
유장은 다시 이엄을 보내 면죽의 제군을 지휘하게 했으나, 이엄은 무리들을 이끌고 선주에게 항복했다. 선주의 군이 더욱 강성해지자 제장들을 나누어 보내 속현들을 평정했다.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은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백제(白帝), 강주(江州), 강양(江陽)을 평정하고, 오직 관우만이 남아 형주를 진수했다. 선주가 진군하여 낙(雒-광한군 낙현)을 포위했다. 이때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이 성을 수비했는데 공격을 받고 근 1년이 지났다.
 건안 19년(214년) 여름, 낙성(雒城)이 격파되었다

진군하여 성도(成都-촉군 성도현)를 포위한 지 수십 일 만에 유장이 성을 나와 항복했다. 

촉이 부유하고 풍성하니 선주는 주연을 베풀어 사졸들을 크게 대접하고 촉성(蜀城) 중의 금은을 취해 제장들에게 나누어주고 곡식과 비단은 되돌려 보냈다. 

 
선주는 또 익주목(益州牧)을 겸했는데(영 익주목), 제갈량을 고굉(股肱-신임하는 중신), 법정을 모주(謀主-주요한 모사), 관우, 장비, 마초 등을 조아(爪牙-용맹한 무장), 허정(許靖), 미축(麋竺), 간옹(簡雍)을 빈우(賓友-빈객 같은 벗)로 삼았다. 동화(董和), 황권(黃權), 이엄(李嚴) 등은 본래 유장이 임용했고, 오일(吳壹), 비관(費觀) 등은 또한 유장의 혼친(婚親-인척)이고, 팽양(彭羕)은 또한 유장에게 배척되었고, 유파는 예전에 기한(忌恨-증오하고 원망함)한 자이나, 이들 모두를 현임(顯任-현요직)에 두어 그 기량과 재능을 다하게 하니, 뜻있는 선비치고 다투어 힘쓰지 않는 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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