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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흥 3년(225년) 봄, 제갈량이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고  그해 가을에 모두 평정했다.

군자(軍資-군수물자)가 이곳에서 나오니 나라가 부유하고 넉넉해졌다. 군대를 정비하고 , 훈련하며 크게 군사를 일으킬 때를 기다렸다.

건흥 5년(227년), 제군(率諸)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한중(漢中)에 주둔했다. 출병에 즈음하여 상소(上疏)했다

- “선제(先帝-이전 황제 즉 유비)께서 창업한 후 반도 이루시기 전에 중도에 붕조(崩殂-붕어)하시고,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뉘고 익주는 피폐했으니 이는 실로 위급(危急), 존망(存亡)의 때입니다. 그러나 가깝게지내는 신하가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런 장수가 밖에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선제의 후은을 잊지 못해 폐하께 보답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실로 성청(聖聽-임금이 귀로 듣는 것)을 널리 열어 선제께서 남긴 덕을 빛내고 지사(志士)들의 의기를 넓히셔야 하며, 함부로 스스로를 비루한 사람이라 낮추고 대의를 잃은 비유를 들어 충간(忠諫)이 들어오는 길을 막으셔서는 안 됩니다.  

 
궁중(宮中)과 부중(府中-관부)은 모두 한 몸이니 척벌장비(陟罰臧否-선행을 상주고 악행을 벌함)에 서로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간사하게 죄를 범한 자와 충성스럽고 착한 일을 한 자가 있다면 의당 유사(有司-해당 관원)에 회부해 그 형벌과 상을 논하도록 하여 폐하의 평명(平明-공명정대)한 이치를 밝혀야 하며, 사사로움에 치우쳐 안팎의 법이 서로 달라서는 안 됩니다.  
 
시중(侍中), 시랑(侍郎)인 곽유지(郭攸之), 비의(費禕), 동윤(董允) 등은 모두 선량하고 성실하며 뜻과 헤아림이 충성스럽고 깨끗하니, 이 때문에 선제께서 이들을 뽑아 쓰고 폐하께 남긴 것입니다. 생각건대 궁중의 일은 크건 작건 모두 이들에게 물으시고 그 연후에 시행하신다면 필시 부족한 점을 보충해 널리 보탬이 될 것입니다. 장군 상총(向寵)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공평하며 군사(軍事)에도 정통해 예전에 선제께서 처음 써 보시고 유능하다고 칭찬하셨고, 이 때문에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상총을 독(督 사령관)으로 삼으셨습니다. 생각건대 영중(營中)의 일은 모두 그에게 물으시면 필시 군대를 화목(和睦)하게 하고 그 우열(優劣)에 따라 사람들을 적소에 둘 것입니다. 
 
현신(賢臣)을 가까이 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한 것이 바로 선한(先漢-전한)이 흥륭(興隆-흥성)한 까닭이고, 소인을 가까이 하고 현신을 멀리한 것이 곧 후한(後漢)이 기울고 무너진 까닭입니다. 선제께서 생전에 매번 신과 더불어 이 일을 논하실 때마다, 일찍이 환제, 영제 때의 어지러움을 탄식하고 통한해 하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시중(侍中), 상서(尙書), 장사(長史), 참군(參軍)은 모두 충성스럽고 선량하며 죽음으로 절의를 지킬 신하들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이들을 가까이 하고 믿으신다면 한실의 융성은 가히 날을 헤아리며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본래 포의(布衣-무명옷; 평민)로 남양(南陽)에서 몸소 밭을 갈며 그럭저럭 난세에서 성명(性命-목숨)을 보전하려 할 뿐 제후에게 문달(聞達-이름이 알려져 등용됨)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제께서 신을 비루하다 하지 않고 외람되게도 친히 몸을 낮추시고 신의 초려(草廬)를 세 번 찾아 당세의 일을 물으시니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를 위해 구치(驅馳-분주하게 힘씀)할 것을 약속드렸습니다. 그 뒤 기울어져 뒤집히는 위험(傾覆)을 당하자 군이 패할 때 임무를 받아 위난(危難) 속에서 명을 받들었고 그 이래로(유비가 제갈량을 찾아온 이래) 21년이 지났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근신(謹愼-삼가고 조심함)함을 아시고 이 때문에 붕어하실 때 신에게 큰일을 맡기셨습니다. 명을 받은 이래 밤낮으로 근심하고 탄식하며, 부탁받은 바에 힘쓰지 못해 선제의 밝음을 상하게 될까 두려워하니, 이 때문에 5월에 노수(瀘水)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이제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병갑(兵甲-병기와 갑옷) 또한 넉넉하니 응당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해야 합니다. 노둔(駑鈍-미련하고 둔함)한 재주를 다해 간흉(姦凶)을 물리치고 한실을 부흥해 구도(舊都-옛 수도, 즉 낙양, 장안)로 돌아가려 합니다. 이것이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하는 신의 직분(職分-직책과 본분)이며, 손익(損益)을 헤아려 극력으로 충언을 올리는 것은 곽유지, 비의, 동윤의 임무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하는 일을 신에게 맡기시고, 만약 성과가 없으면 신의 죄를 다스리고 선제의 영전에 고하십시오. 만약 덕을 흥하게 하는 말이 없으면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태만함을 꾸짖어 그 허물을 분명히 드러내십시오. 또한 폐하께서는 스스로 깊이 생각하시며 바른 도리를 물으시고, 좋은 말을 살피고 받아들여 선제의 유조(遺詔)를 깊이 새겨 따르신다면, 신은 그 은혜에 감읍해 마지않겠습니다. 이제 먼 길을 떠나며 표(表)를 올리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출병하여 면양(沔陽-익주 한중군 면양현)에 주둔했다.
 
건흥 6년(228년) 봄, 야곡도(斜谷道)를 거쳐 미(郿- 우부풍 미현)를 취하려 한다고 양성(揚聲-일부러 소문냄)하고 조운, 등지를 의군(疑軍-속이는 군사)으로 삼아 기곡(箕谷)을 점거하게 하자, 위(魏)의 대장군 조진(曹眞)이 군을 이끌고 이를 막았다. 제갈량 자신은 제군(諸軍)을 이끌고 기산(祁山)을 공격했는데, 융진(戎陳-군진)이 정제(整齊-정돈되어 가지런함)되어 있고, 상벌이 엄숙하며 호령(號令)이 분명했다. 남안(南安), 천수(天水), 안정(安定) 세 군(郡)이 위(魏)를 배반하고 제갈량에 호응하니 관중(關中)이 진동했다.

위(魏) 명제(明帝)는 서쪽으로 가서 장안을 지키고 장합(張郃)에게 명하여 제갈량을 막게 했다. 제갈량은 마속(馬謖)에게 선두에서 제군(諸軍)을 이끌게 해 가정(街亭)에서 장합과 싸우게 했다.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節度-명령, 지휘통제)를 어기고 거동(擧動)이 실의(失宜-부적절함)하여 장합에게 대파 당했다. 제갈량은 서현(西縣-천수군 서현)의 천여 가(家)를 뽑아 한중으로 되돌아오고 마속을 죽여 군사들에게 사죄했다. 

상소를 올렸다, 

“신이 미약한 재주로 외람되게 과분한 자리를 차지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삼군을 독려했으나, 능히 규율을 가르치고 법을 밝히지 못해 일에 신중하지 못하여서 가정(街亭)에서는 명을 어기는(違命) 허물을 범하고, 기곡(箕谷)에서는 경계하지 못한(不戒) 실책을 범했으니, 그 허물은 모두 신이 임무를 줌에 있어 방법이 잘못된데 있습니다. 신이 명철하게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휼사(恤事-일을 고려함)에 크게 어두웠으니, [춘추]에서 통수 자를 질책한다(責帥)라 함이 바로 신의 직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청컨대, 스스로 3등(等)을 깎아 그 허물을 꾸짖게 해 주십시오.”  
 
이에 제갈량을 우장군(높은 장군에 하나로 수도 방위), 행 승상사(行丞相事)(승상의 사무를 대행)로 삼고, 총괄하는 바는 예전과 같게 했다. 
겨울, 제갈량이 다시 산관(散關)을 나와 진창(陳倉)을 포위했다. 조진이 이를 막았고 제갈량은 군량이 다하여 퇴각했다. 위(魏)의 장수 왕쌍(王雙)이 기병을 이끌고 제갈량을 추격하니 제갈량이 더불어 싸워 격파하고, 왕쌍을 참수했다.
건흥 7년(229년), 제갈량이 진식(陳式)을 보내 무도(武都), 음평(陰平)을 공격했다. 위(魏) 옹주자사 곽회(郭淮)가 군을 이끌고 진식을 공격하려 하자 제갈량이 직접 출병해 건위(建威)에 도착했고 곽회가 퇴환하니 마침내 두 군(郡)을 평정하였다.  
 
제갈량에게 조책(詔策)을 내렸다. 
 
“가정 싸움의 허물은 마속에게서 비롯된 것이나 그대는 자신의 허물로 돌려 심히 스스로 폄억(貶抑-폄하하고 억제함. 벼슬을 내림)하니, 그대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워 그 청을 들어주었다. 지난해에 왕사를 빛내 왕쌍을 참수하고 올해도 정벌하여 곽회를 둔주(遁走-도주)케 했다. 
 
저(氐), 강(羌)을 항복시켜 모으고 2군(郡)을 회복했으며, 위엄은 흉포한 무리를 제압하고 공훈은 현연(顯然)하도다. 지금 바야흐로 천하가 소란스럽고 원악(元惡-원흉. 악행의 우두머리)이 아직 효수되지 않았고 그대는 대임을 맡은 나라의 기둥이니, 오래도록 스스로 관직을 낮추고있으면  홍렬(洪烈-위대한 공업)을 크게 드날릴수가 없다. 이제 다시 그대를 승상으로 삼으니 사양치 말라.”

건흥 9년(231년), 제갈량이 다시 기산(祁山)으로 출병했다. 목우(木牛)로 운송했는데, 군량이 다 떨어져 퇴각하다 위(魏)의 장수 장합(張郃)과 교전해, 활을 쏘아 장합을 죽였다.

건흥 12년(234년) 봄, 제갈량이 대군을 모두 이끌고 야곡(斜谷)을 거쳐 출병했다. 유마(流馬)로 운송하며 무공(武功) 오장원(五丈原)을 점거하고,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과 위남(渭南)에서 대치했다. 
 
제갈량은 늘 군량이 이어지지 않아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함을 근심하였으므로 이에 군사를 나눠 둔전하고 오래도록 주둔할 기초를 만들었다. 경작하는 군사들이 위수 강변의 백성들과 섞여 지냈으나 백성들은 편안히 지내고 군에는 사사로움이 없었다.

서로 대치한 지 백여 일이 지나 그해 8월, 제갈량이 질병으로 군중에서 죽으니, 이때 나이 54세였다

군이 퇴각하자 선왕(宣王-사마의)이 그의 영루(營壘)와 처소(處所)를 둘러보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奇才)로다!”

제갈량은 한중(漢中) 정군산(定軍山)에 매장하도록 유언했는데, 산에 의지해 분묘를 만들고 무덤은 관이 들어갈 정도로만 하며, 평상복으로 염하고 기물(器物)을 쓰지 말도록 했다.  

 
조책(詔策)을 내렸다, 
 
“생각건대 그대의 체자(體資-천성, 품성)는 문무(文武)를 갖추고 명예(明叡-총명하고 지혜로움), 독성(篤誠-독실하고 성실함)하여, 탁고(託孤)의 유조를 받아 몸소 짐을 광보(匡輔-보필)하니, 끊어진 것을 잇고 쇠미한 자를 흥하게 하며 정난(靖亂-국난을 평정함)할 뜻이 있었다. 이에 육사(六師-육군. 황제의 군대)를 정돈해 정벌하지 않은 해가 없었고, 신무(神武)를 혁혁하게 빛내고 위엄을 팔황(八荒-온 천하)에 떨쳐 계한(季漢-촉한)에 큰 공을 세웠으니 이윤, 주공의 큰 공훈과 나란하도다. 
 
어찌 하늘이 보우하지 않아 대사가 거의 이루어지려 하는데 병을 만나 죽게 되었는가! 짐은 상심하고 서러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구나. 무릇 덕을 존중해 공의 순서를 세우고 행적을 기록해 시호를 명하니, 이로써 장래에 빛나게 하고 책에 기재해 불후(不朽)하게 하려 한다. 지금 사지절(使持節) 좌중랑장(左中郎將) 두경(杜瓊)을 시켜 그대에게 승상(丞相) 무향후(武鄕侯)의 인수와 충무후(忠武侯)의 시호를 내리노라. 혼령이 있으면 이 총영(寵榮-영예)에 기뻐하리라.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예전에 제갈량이 스스로 후주(後主-유선)에게 표를 올렸었다, 
 
“성도에 뽕나무 8백 그루가 있고 메마른 땅 열다섯 경(頃)이 있으니 자제들이 입고 먹기에는 스스로 넉넉합니다. 신이 밖에서 임무를 받들 때는 따로 조달할 것 없이 제 한 몸의 먹고 입는 것은 모두 관부에 의지했으므로 따로 치생(治生-생활의 방도를 차림)하여 척촌(尺寸-적은 양)을 보태지는 않았습니다. 신이 죽었을 때 안으로 여분의 비단이나 밖으로 남은 재산이 있어 폐하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죽은 뒤에 보니 그 말과 같았다. 제갈량은 성정이 교사(巧思-교묘한 구상)에 능하여 연노를 개량하고 목우, 유마가 모두 그의 생각에서 나왔다. 병법을 추연(推演-미루어 넓힘)하고 팔진도(八陳圖)를 만드니 모두 그 요체를 얻을 수 있었다.  
 
경요(景耀) 6년(263년) 봄, 조령을 내려 제갈량을 위해 면양(沔陽-한중군 면양현)에 사당(廟)을 세웠다.
 
가을, 위(魏) 진서장군(鎭西將軍) 종회(鍾會)가 촉을 정벌해 한천(漢川)에 도착하자 제갈량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군사들에 명해 제갈량의 묘 근처에서 말에게 꼴을 먹이거나 땔나무를 캐지 못하게 했다. 제갈량의 동생인 제갈균(諸葛均)은 관직이 장수교위에까지 이르렀다.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諸葛瞻)이 작위를 이었다

평한다. 제갈량은 상국(相國)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의궤(儀軌-예법의 본보기)를 보이고, 관직을 간략히 하여 권제(權制-임시 제도)에 따르고, 성심을 열어 공도(公道)를 베풀었다. 충성을 다하고 보탬이 된 자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주고, 법을 어기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한 자라도 반드시 벌주었다. 죄를 인정하고 실토한 자는 비록 중죄라도 반드시 풀어주고, 헛된 말로 교묘히 꾸미는 자는 비록 가벼운 죄라도 반드시 죽였다. 선행이 작다 하여 상주지 않는 일이 없고, 악행이 작다 하여 문책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모든 일을 정련(精練)히 하여 그 근본을 다스리고, 명분에 따라 그 실질을 책임지우며(명분과 실질이 서로 부합하게 했다는 말) 헛된 것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마침내 나라 안 모든 이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경애하고, 비록 형정(刑政)이 준엄했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그 마음 씀이 공평하며 권하고 경계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가히 다스림을 아는 빼어난 인재(識治之良才)로 관중, 소하의 아필(亞匹-버금가는 짝)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임기응변의 지략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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