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안 20년(215년), 손권은 선주가 이미 익주를 얻었다 하여, 사자를 보내 형주를 돌려받고자 한다고 통보했다. 선주가 말했다,
“양주(涼州)를 얻으면 형주(荊州)를 주겠소.”
손권이 분노하여, 여몽을 보내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陽)의 세 군(郡)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선주는 군사 5만을 이끌고 공안(公安)으로 내려가고, 관우에게 익양(益陽-장사군 익양현)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 해, 조공이 한중을 평정하자 장로는 파서(巴西)로 달아났다. 선주가 이를 듣고 손권과 화해하니, 형주를 분할해 강하, 장사, 계양은 동쪽(손권)에 속하게 하고, 남군, 영릉, 무릉은 서쪽(유비)에 속하게 하고는, 군을 이끌고 강주(江州-파군 강주현)로 돌아왔다. 황권을 보내 군을 이끌고 가서 장로를 맞이하게 했으나 장로는 이미 조공에 항복한 뒤였다.
조공은 하후연, 장합을 한중에 주둔하게 하고, 여러 번 파(巴)의 경계를 침범했다.
선주는 장비에게 명해 탕거(宕渠-파군 탕거현)로 진병하게 하자, 와구(瓦口)에서 싸워 장합 등을 격파했다. 장합은 군사를 거두어 남정(南鄭-한중군 남정현)으로 돌아갔고, 선주 또한 성도로 돌아갔다.
건안 23년(218년), 선주가 제장들을 이끌고 한중으로 진병했다. 장군 오란(吳蘭), 뇌동(雷銅) 등을 나누어 보내 무도(武都-양주 무도군)로 들어가게 했으나 모두 조공의 군대에게 함몰되었다. 선주가 양평관(陽平關)에 머물며 하후연, 장합 등과 서로 맞섰다.
건안 24년(219년) 봄, 양평에서 남쪽으로 면수(沔水)를 건너 산을 따라 점차 전진하여 정군산(定軍山)에 영채를 세웠다. 하후연이 군을 이끌고 와서 그 땅을 다투었다. 선주는 황충에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이를 공격하게 하여 하후연군을 대파하고, 하후연과 조공이 임명한 익주자사 조옹(趙顒) 등을 참수했다.
조공이 장안으로부터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했다. 선주가 멀리서 이를 헤아려 말했다,
“비록 조공이 온다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니 내가 반드시 한천(漢川)을 지키겠다.”
조공이 도착하자 선주는 군사들을 모아 험고한 곳을 지키고 끝내 교봉(交鋒-교전)하지 않자 (조공이) 여러 달이 지나도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사망자가 날로 많아졌다.
여름, 조공은 과연 군을 이끌고 돌아가니 선주가 마침내 한중을 차지했다. 유봉(劉封), 맹달(孟達), 이평(李平) 등을 보내 상용(上庸)에서 신탐(申耽)을 공격했다.
가을, 군하(群下많은 신하)들이 선주를 올려 한중왕(漢中王)으로 삼고, 한나라 황제에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렸다.
“평서장군(平西將軍) 도정후(都亭侯) 신(臣) 마초(馬超), 좌장군(左將軍) 장사(長史) 영(領) 진군장군(鎭軍將軍) 신 허정(許靖), 영사마(營司馬) 신 방희(龐羲), 의조종사중랑(議曹從事中郎) 군의중랑장(軍議中郎將) 신 사원(射援),
군사장군(軍師將軍) 신 제갈량(諸葛亮), 탕구장군(盪寇將軍) 한수정후(漢壽亭侯) 신 관우(關羽), 정로장군(征虜將軍) 신정후(新亭侯) 신 장비(張飛), 정서장군(征西將軍) 신 황충(黃忠), 진원장군(鎭遠將軍) 신 뇌공(賴恭), 양무장군(揚武將軍) 신 법정(法正), 흥업장군(興業將軍) 신 이엄(李嚴) 등이 120인이 상언합니다.
옛날 당요(唐堯-요임금)는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조정에 사흉(四凶-요임금 때 공공共工, 환두驩兜, 삼묘三苗, 곤鯀) 이 있었고, 주 성왕(周成王)이 어질고 현명했으나 4국(四國-주무왕의 아우인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과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에게 각각 봉해진 나라)이 작난(作難)했습니다. 고후(高后-한고조의 황후인 여태후)가 칭제(稱制)하자 여(呂)씨들이 천명을 훔치고, 효소제(孝昭帝)가 유충(幼沖-나이가 어림)하자 상관씨(상관걸上官桀)가 역모하였으니, 이들 모두가 세총(世寵-당대의 은총)을 빙자하여 국권을 짓밟고 극도로 흉악하게 난을 일으켜 사직을 위태롭게 하였습니다. 대순(大舜-순임금), 주공(周公), 주허(朱虛-주허후 유장劉章), 박륙(博陸-박륙후 곽광霍光)이 없었다면 이들을 유방(流放-내쫓음)하고 금토(禽討-사로잡아 주륙함)할 수 없어 위태롭고 기울어졌을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성덕(聖德)을 타고나 만방(萬邦)을 통리(統理)하시나 액운(厄運)을 만나 이를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동탁이 먼저 난을 일으켜 경기(京畿)를 탕복(蕩覆-휩쓸고 뒤집어엎음)하고, 조조가 뒤이어 화(禍)를 일으켜 천형(天衡-천자의 권위)을 훔쳤습니다. 황후, 태자가 짐살(鴆殺)당했고, 천하를 박란(剝亂-찢고 어지럽힘)하며 민물(民物-백성과 만물)을 잔훼(殘毁)했습니다. 오래도록 폐하께서 몽진(蒙塵) 길에 올라 근심과 재앙을 뒤집어쓰게 하며 텅 빈 읍에 유폐시켰습니다. 사람과 신령에 주인이 없게 하여 왕명을 막아 끊고, 황극(皇極-제왕의 법도. 치우침 없는 중정中正의 도)을 싫어하여 가리며 신기(神器-제위, 정권을 비유)를 도적질하려 합니다.
좌장군 영 사례교위 예, 형, 익 삼주목(豫荊益三州牧-예주목, 형주목, 익주목) 의성정후(宜城亭侯) 유비는 조정의 작질(爵秩-작위와 봉록)을 받아, 힘을 다하여 국난에 목숨을 바칠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비는 일찍이) 그 조짐을 보고 혁연(赫然)히 분발(憤發-분격)하여 거기장군 동승과 공모하니, 조조를 주살해 장차 국가를 안정시키고 옛 도읍을 안녕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동승이 일을 다룸이 치밀하지 못해, 조조의 유혼(遊魂)이 마침내 악으로 자라나 해내(海內)를 잔민(殘泯-잔멸)케 했습니다. 신 등은 늘 왕실에 크게는 염락(閻樂)의 화나 작게는 정안(定安)의 변이 있을까 두려우니, 숙야(夙夜-아침저녁)로 췌췌(惴惴-두려워하는 모양)하고 전율(戰慄-두려워서 몸이 떨림), 누식(累息-숨을 죽이고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함)할 지경입니다.
옛날 우서(虞書-서경 우서편)에서 ‘敦序九族’(돈서구족-9족의 질서를 잡고 두텁게 대우함)이라 했고, 주나라 때는 2대(하, 은)를 본받아 동성(同姓)을 봉건(封建)했으며, [시경]에서 그런 뜻을 드러낸 지 이미 오래입니다. 한나라가 처음 흥하였을 때 강토를 나누어 자제들을 왕으로 올리니 이로써 여러 여씨들의 난을 꺾고 태종(太宗-전한 문제의 묘호)의 기업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신 등이 보건대, 유비는 폐부(肺腑-허파. 친밀한 관계를 비유), 지엽(枝葉-방계일족)에 종자(宗子-종실 자제), 번한(藩翰-울타리와 기둥)으로, 국가를 염려하고 난을 그치게 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조조를 한중에서 격파한 이래 해내의 영웅들이 명망을 우러르며 의부(蟻附-개미가 달라붙듯 많은 이들이 귀부함)하나, 작호(爵號)가 높지 않고 구석(九錫)이 더해지지 않으니 사직을 진위(鎭衛-진수하고 보위함)하여 만세(萬世)에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깥에서 천자의 명을 받들려 해도 예명(禮 命-조정의 책명)이 단절되어 있습니다. 옛날 하서(河西)태수 양통(梁統) 등은 한(漢)이 중흥할 때에 이르러(왕망 말 후한 초) 산하(山河)에 가로막히고, 지위와 권한이 같아 서로 능히 통솔하지 못하자, 모두 함께 두융(竇融)을 추거해 원수(元帥)로 삼으니, 끝내 효적(效績-공적)을 세우고 외효(隗囂)를 격파했습니다. 지금 사직의 어려움은 농(隴), 촉(蜀) 때보다(농서의 외효와 촉의 공손술) 더 급박합니다. 조조는 밖으로 천하를 집어삼키고 안으로 뭇 신료들을 잔멸하여 조정에 소장지위(蕭牆之危-내부의 위험)가 있으니, 어모(禦侮-모욕을 막아냄)하지 않는다면 가히 천하인 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할 만 합니다.
이에 신 등이 옛 제도에 의거해 유비를 한중왕으로 봉하고 대사마로 삼아, 육군(六軍)을 동제(董齊-영도)하고 동맹을 규합하여 흉역(凶逆)을 소멸(掃滅-소탕)하려 합니다. 한중(漢中), 파(巴), 촉(蜀), 광한(廣漢), 건위(犍爲)를 국(國)으로 삼고, 부서를 설치한 것은 한나라 초 제후왕의 옛 제도에 따랐습니다. 무릇 권의(權宜-임시적인 편의. 임시방편)의 제도가 실로 사직에 이롭다면 이를 임의로 했다해도 가합니다. 그 연후에 공(功)이 이루어지고 일이 세워지면 신 등은 물러나 교죄(矯罪-군주의 명을 가탁한 죄)를 받을 것이니, 설령 죽임을 당한다 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마침내 면양(沔陽-한중군 면양현)에 단장(壇場-제단을 마련해놓은 곳)을 설치하여 군사들을 벌려 세우고, 뭇 신하들이 배위(陪位-배석)하여 상주문 읽기를 마친 후 선주에게 왕관(王冠)을 씌웠다.
선주가 한나라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신은 구신(具臣-수효만 채우는 변변찮은 신하)의 재주로 상장(上將)의 임무를 맡아 삼군(三軍)을 동독(董督-통솔)하고 바깥에서 명을 받들었으나, 도적을 쓸어 없애 왕실을 바로잡지 못해 오래도록 폐하의 성스러운 교화를 쇠미하게 하고 육합(六合-천하, 우주)의 내부가 막혀 통하지 않게 하니, 근심으로 반측(反側-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임)하고 열병을 앓는 듯합니다.
지난 날 동탁이 난을 일으킨 이후 군흉(群兇)들이 종횡하여 해내(海內)를 잔박(殘剝-해치고 찢음)했습니다. 폐하의 성덕(聖德), 위령(威靈)에 힘입어 사람과 신령이 함께 감응하니, 혹 충의로운 자가 떨쳐 일어나 토벌하고, 혹 상천(上天-하늘)이 벌을 내려 포역(暴逆-난폭하여 도리를 거스름)한 자들을 모두 죽여 얼음이 점차 녹듯 모두 사라졌으나, 오직 조조만이 오래도록 효제(梟除-제거)되지 않아 국권을 침천(侵擅-침범하여 농단함)하며 방자한 마음으로 극히 어지럽히게 되었습니다.
신이 예전에 거기장군 동승과 함께 조조토벌을 도모했으나, 일을 다룸이 치밀하지 못해 동승은 해를 입게 되었고, 신은 거처를 잃고 파월(播越-외지로 망명함. 방랑함)하여 충의를 열매 맺지 못하니, 마침내 조조가 극히 흉역하게도 주후(主后-황후)를 육살(戮殺-살륙)하고 황자(皇子)를 짐독으로 해치게 하였습니다. 비록 동맹을 규합하고 힘을 떨치려 했으나 (신이) 나약(懦弱) 불무(不武)하여 여러 해를 지나도록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항상 이 몸이 죽어 국은(國恩)을 저버릴까 두려우니, 자나 깨나 길이 탄식하고 해가 저물도록 근심합니다.
지금 신의 뭇 신료들이 이르길, 옛 우서(虞書-서경 우서편)에서 ‘敦敘九族, 庶明勵翼’(돈서구족 서명려익)이라 하고
오제(五帝)는 여기서 빼고 더했지만 이 도를 폐하진 않았으며, 주나라는 2대(하, 은)를 본받아 희(姬)씨 들을 세워 실로 진(晉), 정(鄭)의 보필에 힘입었고, 고조(高祖)께서 용흥(龍興-용이 날아오름. 제왕이 흥기함을 비유)한 후 자제(子弟)들을 왕으로 높여 9국(國)을 크게 여니 끝내 여(呂)씨들을 베어 대종(大宗-적장자 계보; 황실)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하며, 지금 조조가 곧고 바른 것을 미워하고 그 무리가 실로 번성하여 화심(禍心-재앙을 일으키려는 마음)을 품고 찬도(簒盜-제위를 도적질함)할 뜻이 이미 드러났으나, 종실(宗室)이 미약하고 제족(帝族-황족)들에게 지위가 없으니, 이에 옛 법식을 참조하고 권의(權宜-임시방편)에 잠시 의지한다 하여 신을 대사마(大司馬) 한중왕(漢中王)으로 올렸습니다.
신이 엎드려 스스로 세 번 돌아보건대, 나라의 후은(厚恩)을 받아 일방(一方-한쪽 방면)에서 임무를 맡았으나, 힘을 써도 성과가 없고 얻은 바가 이미 지나치게 많은데, 다시 높은 지위를 욕되게 해 죄와 비방을 무겁게 함은 마땅한 일이 아니나, 뭇 신료들이 의(義)로써 신을 핍박합니다.
신이 물러나 생각해보건대, 구적(寇賊-도적)을 효수하지 못하는 한 국난이 끝나지 않고, 종묘가 위태롭고 사직이 장차 무너지려 하니 실로 신이 쇄수(碎首-머리를 부숨. 죽음을 각오한 행동을 비유)해야 할 때이니, 만약 응권통변(應權通變-시의에 응해 변통함)하여 성조(聖朝)를 평안케 할 수 있다면 비록 불과 물에 뛰어드는 일이라 할지라도 사양치 않을 것인데 감히 상의(常宜)를 염려해 후회를 방비하겠습니까. 이에 중의(衆議-중론)를 따라 인새(印璽-옥새)를 배수(拜受-공손히 받음)하여 나라의 위엄을 높이려 합니다.
작호(爵號)를 우러러 생각하면 지위는 높고 은총은 두터우며, 보효(報效-힘써 보답함)할 일을 곰곰이 생각하면 근심은 깊고 책임은 중하니, 경포누식(驚怖累息-놀랍고 두려워 숨을 죽임)함이 마치 골짜기에 임한 듯합니다. 진력수성(盡力輸誠-힘을 다하고 정성을 쏟음)하여 육사(六師-육군六軍)를 독려하고, 뭇 의로운 이들을 이끌고 천시에 순응해, 흉역(凶逆)을 박토(撲討-토벌)하고 사직을 안녕케 해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겠습니다. 삼가 배장(拜章-장章을 올림)하고 (※) 역(驛-역참)을 통해 좌장군, 의성정후의 인수는 반환해 올립니다.”
그리고 성도로 돌아와 다스리고, 위연(魏延)을 뽑아 도독으로 삼아 한중(漢中)을 진수하게 했다.
이때 관우가 조공의 장수 조인(曹仁)을 공격하고, 번(樊)성에서 우금(于禁)을 사로잡았다. 갑자기 손권이 관우를 습격해 죽이고 형주를 차지했다.
건안 25년(220년), 위문제(魏文帝-조비)가 존호(尊號)를 칭하고 연호를 고쳐 황초(黃初)라고 했다. 혹 전해 듣기로 한나라 황제가 해를 입었다 하니, 이에 선주는 발상(發喪)하여 상복을 입고, 시호를 추존해 효민황제(孝愍皇帝)라 했다. 이 이후로 여러 곳에서 뭇 길조들이 있다고 말하여 해와 달처럼 서로 잇대었다.(日月相屬)
이 때문에 의랑 양천후(陽泉侯) 유표(劉豹), 청의후(靑衣侯) 상거(向擧), 편장군 장예(張裔), 황권(黃權), 대사마 속(屬) 은순(殷純), 익주 별가종사 조작(趙莋), 치중종사 양홍(楊洪), 종사좨주 하종(何宗), 의조종사 두경(杜瓊), 권학종사(勸學從事) 장상(張爽), 윤묵(尹黙), 초주(譙周) 등이 상언했다
- “신이 듣기로 하도(河圖), 낙서(洛書), 오경참위(五經讖緯)는 공자가 살핀 것으로 험응(驗應-드러난 징조가 들어맞음)이 오래되었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낙서견요도(洛書甄曜度)에서
‘붉은 기운이 3일 나타나 덕이 창성하면 9세 때에 이르러 비를 만나고(會備-유비의 비 암시. 備는 갖추다로 보는 게 맞겠지만, 황제즉위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해 참위서를 인용하는 이들의 의도에 맞추어 풀었음. 이하 같음) 합해져 황제의 때가 된다.’
고 했고, 낙서 보호명(洛書寶號命)에서
‘하늘이 제왕의 도를 헤아려 비(備)가 칭황(稱皇)하고 악계(握契)를 통솔하니, 백번 성공하고 실패하지 않는다.’
했고, 낙서녹운기(洛書錄運期)에서
‘아홉 제후와 일곱 호걸이 천명을 다투어 백성들이 취해(炊骸-해골을 삶아먹음. 기근의 참상을 형용)하고, 도로에서 사람의 머리를 밟고 다니니, 누가 주관하여 현(玄)하고(유비현덕의 현 암시) 위로하겠는가.’
라 했고, 효경구명결록(孝經鉤命決錄)에서
‘제(帝)가 세 번 세워지고 아홉 번 비(備)를 만난다.’
고 했습니다.
신의 아비들이 살아있을 때 말하길, 남서쪽에 여러 차례 누런 기운이 있어 몇 장(丈)이나 곧바로 선 것을 여러 해 동안 보았는데, 때때로 상서로운 구름과 바람이 선기(璿璣-선성과 기성. 북두칠성의 두 번째, 세 번째 별)에서 아래로 내려와 이에 호응했다 하니, 이는 괴이하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또한 건안 22년(217년) 중, 여러 차례 깃발 같은 기운이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르며 중천(中天-하늘의 한가운데)을 운행했는데, [하도], [낙서]에서는
‘필히 천자가 그 방향에서 나온다.’
고 했습니다. 게다가 올해 태백(太白-금성), 형혹(熒惑-화성), 전성(塡星-토성)이 항상 세성(歲星-목성)을 따라 서로 뒤쫓았습니다. 가까이로는 한나라가 처음 흥할 때 오성(五星-수, 금, 화, 목, 토성)이 세성(歲星)을 따르며 꾀했는데, 세성(歲星)은 의(義)를 주관하며 한나라는 서쪽에 위치하고 의(義)의 위쪽 방위이니, (※ ‘인의예지신’의 오상을 방위로 배치하면 각각 동서남북중앙, 즉 의義가 서쪽) 이 때문에 한나라 법에서는 항상 세성으로 인주(人主-군주)를 살폈던 것입니다. 응당 익주에서 성주(聖主-성스러운 군주)가 흥기하여 중흥할 것이나, 이때에는 허도에 황제가 살아 계시므로 군하(群下)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요즈음 형혹이 또 세성을 뒤쫓아 위(胃), 묘(昴), 필(畢) 자리에서 보였습니다. (※위, 묘, 필은 별자리 28수 중 서궁 7수에 속함), 묘(昴), 필(畢)은 천강(天綱-하늘의 벼리. 대강)이고 [역경]에서는 ‘제성(帝星)이 이곳에 있으면 뭇 사악한 것들이 소멸되고 패망한다.’고 했습니다. 성휘(聖諱-군주나 옛 성인의 이름자)가 미리 보이고(※앞에 낙서견요도 등을 인용하며 끌어다 붙인 ‘비’나 ‘현’ 자 등을 말하는 듯), 헤아림이 때에 이르러 증험되고 부합(符合)한 것이 여러 번이며, 이 같은 일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신이 듣기로
‘성왕(聖王)은 하늘보다 먼저 하여도 하늘에 거스르지 않고, 하늘보다 뒤에 하여도 천시를 따르는 것’
(先天而天不違, 後天而奉天時 / 역경)이라 하니, 이 때문에 때에 응하여 생겨나고 신(神)과 더불어 합치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하늘에 응(應)하고 백성에 순(順)하여 속히 대업을 펴시고, 이로써 해내(海內)를 안정시키십시오.”
태부(太傅) 허정(許靖), 안한장군(安漢將軍) 미축(糜竺), 군사장군(軍師將軍) 제갈량(諸葛亮), 태상(太常) 뇌공(賴恭), 광록훈(光祿勳) 황주(黃柱), 소부(少府) 왕모(王謀) 등이 상언했다.
- “조비(曹丕)가 찬역, 시해하여 한실(漢室)을 멸하고 신기(神器)를 훔쳐 차지하고는, 충량(忠良-충성스럽고 선량함)한 이들을 겁박하며 혹독 무도하니, 사람과 귀신이 모두 분독(忿毒-극히 분노하고 원망함)하여 모두 유씨(劉氏)를 그리워합니다. 지금 위로는 천자가 없어 해내가 황황(惶惶-몹시 두려워함)해하나 본받고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앞뒤로 상서한 군하(群下)들이 8백여 명으로, 이들이 모두 부서(符瑞-상서로운 징조)와 도(圖), 참(讖)이 명징(明徵)함을 진술했습니다.
그 사이에 황룡(黃龍)이 무양(武陽-건위군 무양현) 적수(赤水)에서 보였다가 9일 만에 사라졌습니다. 효경원신계(孝經援神契)에서는 ‘덕(德)이 깊은 못에 이르면 황룡이 보인다.’고 했으며 용은 군주의 상징입니다. [역경]의 건(乾)괘 95에서 ‘飛龍在天’(비룡재천)이라 했고, 대왕께서는 용처럼 날아오르니 응당 제위에 오르셔야 합니다.
또한 예전에 관우가 번, 양양을 포위했을 때 양양의 남자 장가(張嘉), 왕휴(王休)가 옥새(玉璽)를 헌상했는데, 옥새는 한수(漢水)에 잠겨 깊은 샘에 엎드려 있었으나, 대낮에도 찬란하게 빛나 신령한 광채가 하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무릇 한(漢)은 고조(高祖)께서 일어나 천하를 평정한 국호인데, 대왕께서는 선제(先帝-이전 황제. 여기서는 고조 유방)의 발자취를 좇아 또한 한중(漢中)에서 흥하셨습니다. 지금 천자의 옥새에 신이한 광채가 먼저 보여 한수(漢水)의 끝인 양양에서 출현하고 대왕께서 그 하류에서 이를 받드시니, 이는 분명 대왕께 천자의 지위를 수여한다는 것이며 상서로운 길조와 천명이 서로 부합한 것으로,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옛날 주나라에는 오어(烏魚)의 길조가 있어 사람들이 모두 경사로 여겼고, 2조(二祖-고조 유방과 광무제 유수)가 천명을 받을 때는 [하도], [낙서]에서 미리 드러나니 이로써 징험(徵驗)이 되었습니다. 지금 상천(上天)이 상서로움을 알리고, 군유(群儒-뭇 유생), 영준(英俊-영웅준걸)들이 아울러 하도, 낙서, 공자의 참기(讖記)를 올리며 모두 갖추어 이르고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대왕께서는 효경황제, 중산정왕의 후손으로, 본지백세(本支百世-본파와 지파가 오래도록 이어짐)하여 하늘과 땅이 복을 내리고, 성스런 자태가 석무(碩茂-크게 무성함)하여 신무(神武)함을 몸에 갖추고, 인(仁)으로 뒤덮고 덕을 쌓으며 애인호사(愛人好士-사람을 사랑하고 선비를 아낌)하니, 이로써 사방의 민심이 귀의하고 있습니다. 영도(靈圖-하도)를 살피고 참위서를 열어보니 신명(神明)이 나타나고 명휘(名諱-이름)가 밝게 드러나 있으니, 의당 제위에 올라 2조를 이어 소목(昭穆제사)을 계승한다면(※) 천하에 심히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신 등은 삼가 박사(博士) 허자(許慈), 의랑(議郎) 맹광(孟光)과 함께 예의(禮儀-예법과 의식)를 건립하고 좋은 날을 택해 존호(尊號)를 올립니다.”
이에 성도 무담(武擔)의 남쪽에서 황제에 즉위하고,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건안 26년(221년) 4월 병오일, 황제 유비는 감히 현모(玄牡-희생용 검은 소)를 써서 황천(皇天)의 상제(上帝)와 후토(后土-땅)의 신기(神祇-천신과 지신)에 밝게 고합니다. 한나라가 천하를 차지해 역수(歷數)가 무궁했으나, 일찍이 왕망이 찬역하자 광무황제가 진노하여 이를 주살하고 사직을 다시 보존했습니다. 지금 조조가 무력에 의거하여 안인(安忍-잔인한 짓을 예사로 저지름)하니, 주후(主后)를 육살(戮殺-살륙)하고 도천(滔天-하늘에 차고 넘칠 정도로 죄악이 큼)하게 중국을 망치며 천현(天顯-하늘의 뜻)을 되돌아보지 않았고, 조조의 아들 조비는 흉역한 마음을 품고는 신기(神器)를 훔쳐 차지했습니다. 군신(群臣-뭇 신하), 장사(將士)들이 이르길, 사직이 무너지려 하니 저 유비가 응당 이를 닦아 2조의 대업을 잇고 천벌을 공행(龔行-봉행)해야 한다 했습니다.
저 유비는 덕이 없어 제위(帝位)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 서민(庶民-백성)과 바깥의 만이(蠻夷) 군장(君長)들에게 물으니 그들이 모두 말하길, ‘천명에는 응답하지 않을 수 없고, 조업(祖業-선조의 유업)은 오래도록 폐할 수 없으며, 사해(四海)에 주인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며, 솔토(率土-온 나라 땅)가 저 유비 한 사람을 의지하며 바라봅니다. 천명을 두려워하고 또한 한조(漢阼-한나라의 제위)가 장차 땅에 떨어질 것을 근심하여, 삼가 원일(元日-길일)을 택해 백료(百寮-백관)들과 함께 단(壇)에 올라 황제의 새수(璽綬-옥새와 인끈)를 받듭니다. 번예(燔瘞-제사물품)를 마련해 천신(天神)께 고류(告類-황제나 황태자 즉위식 등 때에 행하는 제사의식)하니, 신들께서는 흠향하시고 한가(漢家)에 복을 주어 사해를 영원히 평안케 하소서
장무(章武) 원년(221년) 여름 4월,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제갈량(諸葛亮)을 승상(丞相), 허정(許靖)을 사도(司徒)로 삼고, 백관(百官)을 두고 종묘(宗廟)를 세워 고황제 이하 선조들에게 협제(祫祭-멀고 가까운 선조를 함께 크게 제사지냄)했다
5월, 황후(皇后) 오씨(吳氏)를 세우고 아들 유선(劉禪)을 황태자로 삼았다.
6월, 아들 유영(劉永)을 노왕(魯王), 유리(劉理)를 양왕(梁王)으로 삼았다. 거기장군 장비(張飛)가 좌우(左右-주변인)에 의해 해를 입었다.
당초 선주는 손권이 관우를 습격한 일에 분노하여 장차 동쪽을 정벌하려 했었다. 이에 가을 7월, 마침내 제군(諸軍)을 이끌고 오(吳)를 정벌했다. 손권은 서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선주는 몹시 성내며 허락지 않았다. 오의 장수 육의(陸議-육손), 이이(李異), 유아(劉阿) 등은 무(巫-형주 남군 무현), 자귀(秭歸-남군 자귀현)에 주둔했다. 오반(吳班), 풍습(馮習)이 무(巫)현에서부터 이이 등을 공파(攻破)하고 자귀에 주둔했다. 무릉(武陵)의 오계만이(五谿蠻夷무릉의 5소수민족)가 사자를 보내 군사를 청했다.
장무 2년(222년) 봄 정월, 선주군(先主軍)은 자귀로 돌아오고, 장군 오반(吳班), 진식(陳式)의 수군(水軍)은 이릉(夷陵-남군 이릉현)에서 장강을 끼고 동서 연안에 주둔했다.
2월, 선주가 친히 제장들을 이끌고 자귀에서 진군하여, 산을 따라 고개를 넘어 이도(夷道-남군 이도현) 효정(猇亭)에 주둔했다. 한산(佷山)에서 무릉으로 통하여 시중 마량(馬良)을 보내 오계만이를 위로하자, 이들이 모두 서로 잇따르며 호응했다. 진북장군 황권은 장강 북쪽의 제군을 감독하며 이릉도(夷陵道)에서 오군(吳軍)과 서로 맞섰다.
여름 6월, 누런 기운이 자귀에서부터 10여 리 되는 곳에서 보였는데 그 넓이가 수십 장에 이르렀다. 그 10여 일 뒤, 육의(陸議)가 선주군을 효정에서 대파하고, 장군 풍습(馮習), 장남(張南) 등이 모두 전몰했다.
선주는 효정에서 자귀로 돌아와 흩어진 군사들을 수합(收合-거두어 합침)하여 마침내 배를 버리고 육로로 어복(魚復-익주 파군 어복현)으로 돌아왔고, 어복현을 영안(永安)으로 고쳤다. 오(吳)에서는 장군 이이, 유아 등을 보내 선주군을 뒤쫓게 하여 남산(南山)에 주둔했다.
가을 8월, 군사를 거두어 무(巫)현으로 돌아왔다. 사도 허정이 죽었다.
겨울 10월, 승상 제갈량에게 조령을 내려 성도의 남북 교외에서 영건(營建제사)하도록 했다. 손권은 선주가 백제(白帝)에 머문다는 것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선주가 이를 허락하고 태중대부 종위(宗瑋)를 보내 보명(報命-답례)했다.
겨울 12월, 한가(漢嘉)태수 황원(黃元)이 선주의 병이 깊다는 것을 듣고 군을 일으켜 거수(拒守-막아서 지킴)했다. (※ [진서] 지리지에 의하면, 장무 원년 후한 때의 촉군속국 → 한가군)
장무 3년(223년) 봄 2월, 승상 제갈량이 성도로부터 영안에 도착했다.
3월, 황원이 진병하여 임공현(臨邛縣-촉군 임공현)을 공격했다. 장군 진홀(陳曶)을 보내 황원을 토벌했다. 황원은 군이 패하고 장강을 따라 내려갔는데, 그 친병(親兵 친히거느리는 병사)에게 결박되어 산 채로 성도로 보내져 참수되었다. 선주는 병이 깊어지자 승상 제갈량에게 탁고(託孤-고아를 맡김)하고 상서령 이엄(李嚴)이 이를 돕게 했다.
여름 4월 계사일, 선주가 영안궁(永安宮)에서 조(殂)했다. 그때 나이 63세였다.
제갈량이 후주에게 상언했다
- “엎드려 생각건대, 대행황제(大行皇帝-대행은 제왕이 죽은 후 시호를 정하기 전 임시로 부르던 호칭)께서는 인(仁)에 힘쓰고 덕(德)을 세워 (인, 덕으로) 부도(覆燾-뒤덮고 널리 비춤)함이 무궁했으나 하늘이 어여삐 여기지 않아 오래도록 침질(寢疾-중병으로 앓아누움)하시더니 이번 달 24일에 홀연 승하(升遐)하셨습니다. 신첩(臣妾)들이 부르짖으며 우니 마치 죽은 부모의 상을 치르는 것 같습니다.
이에 유조(遺詔-임금의 유언)를 돌아보니, 상을 치르는 일에는 대종(大宗)을 염려해 그 동용(動容-거동과 몸가짐)에 더하고 뺌이 있었습니다. 백료(百寮-백관)들은 발상하여 사흘을 채우면 상복을 벗고 매장하는 날에 이르러 다시 예법에 따르게 하고, 군국(郡國)의 태수, 상(相), 도위(都尉), 현령, 현장들은 사흘이 지나면 상복을 벗으라 했습니다. 신 제갈량은 직접 칙계(敕戒)를 받았으므로 신령(神靈)을 두려워하여 감히 이를 어길 수 없습니다. 신이 청컨대, 선하(宣下-조령을 내림)해 봉행(奉行)하시기 바랍니다.”
5월, 재궁(梓宮-임금의 관)이 영안에서 성도로 돌아왔고, 시호를 소열황제(昭烈皇帝)라 했다.
가을 8월, 혜릉惠陵)에 매장했다.
평한다. 선주는 홍의(弘毅-포부가 크고 굳셈), 관후(寬厚-너그럽고 후함)하고 지인(知人-사람을 알아 봄), 대사(待士-선비를 잘 대우함)하니 한 고조의 풍도와 영웅의 그릇을 갖추었던 것 같다.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탁고했으나 심신(心神-마음)에 두 갈래가 없었으니 실로 군신(君臣)의 지공(至公-지극히 공정함)함은 고금의 성궤(盛軌-아름다운 본보기)다. 기권(機權-기지와 임기응변), 간략(幹略-재능과 모략)은 위무제에는 미치지 못해 이 때문에 그 영토는 협소했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헤아리고, 오로지 이익만을 다투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려 했다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