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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諸葛亮)의 자는 공명(孔明)이고, (서주) 낭야(琅邪)군 양도(陽都)현 사람이다. 한(漢) 사례교위(수도방위 및 행정 및 감찰관) 제갈풍(諸葛豐)의 후예다. 


 
부친 제갈규(諸葛珪)는 자가 군공(君貢)이고 한(漢) 말 태산군승(太山郡丞-연주 태산군 군승-군수 보좌)을 지냈다. 제갈량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종부(從父-백부, 숙부를 통칭)인 제갈현(諸葛玄)은 원술(袁術)에 의해 예장(豫章)태수로 임명되자, 제갈량과 제갈량의 동생 제갈균(諸葛均)을 데리고 부임했다. 때마침 한나라 조정에서 다시 주호(朱皓)를 (예장태수로) 뽑아 제갈현을 대신하게 했다. 제갈현은 평소 형주목 유표(劉表)와 교분이 있었으므로 그에게로 가서 의탁했다

제갈현이 죽자 제갈량은 몸소 밭이랑에서 농사지었으며, 양보음(梁父吟)을 부르기 좋아했다.

신장 8척으로 늘 자신을 관중(管仲), 악의(樂毅)에 비교했으나 당시 사람들은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 오직 친한 벗으로 지내던 박릉(博陵-기주 박릉군)의 최주평(崔州平), 영천(潁川-예주 영천군)의 서서(徐庶) 원직(元直) 만이 참으로 그러하다고 인정했다. 

이때 선주(先主-유비)가 신야(新野-형주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서(徐庶)가 선주를 만나보자 선주가 그를 중히 여겼다. 서서가 선주에게 말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와룡(臥龍-누워있는 용)입니다. 장군께서는 그를 보고 싶으십니까?”

선주가 말했다, 
 
“군(君-그대)이 데리고 오시오.” 
 
서서가 말했다, 
 
“이 사람은 가서 만나볼 수는 있으나 몸을 굽혀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의당 몸을 낮추시고 방문하셔야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선주가 제갈량을 방문했고 세 번 만에 만날 수 있었다. 
 
선주는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말했다, 
 
“한나라 황실이 무너지고 간신이 천명을 도용하여  주상(主上)께서 모욕을 당하게 되었소. 나는 스스로의 덕과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천하에 대의를 펴고자 했으나 지술(智術-지모)이 얕고 부족해 창궐(猖蹶-실패, 좌절)하다 오늘에 이르렀소. 그러나 뜻은 여전히 버리지 않았으니, 장차 어찌 해야 할지 알려 주시겠소?” 
 제갈량이 대답했다.
동탁 이래 호걸들이 아울러 일어나 주(州)를 타넘고 군(郡)을 연결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조조는 원소에 비하면 명성은 미약하고 그 군사는 적었으나 마침내 원소를 이겨 약자에서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천시(天時) 만이 아니라 또한 인모(人謀-사람의 꾀)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조는 백만 군사를 거느린 채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호령하므로(挾天子而令諸侯) 실로 그와 역량을 다툴 수 없습니다. 손권은 강동을 점거해 차지한 지 이미 3대가 지났고, 나라는 험하며 백성들은 귀부하고 현능한 이들이 쓰이고 있으니, 가히 동맹으로 삼을지언정 도모할 수는 없습니다. 
 
형주(荊州)는 북쪽으로 한수, 면수에 의지해 그 이익이 남해(南海)에 다다르고, 동쪽으로 오회(吳會-오, 회계)와 연결되고 서쪽으로 파(巴), 촉(蜀)과 통하니 이는 용무지국(用武之國-용병할 요충지)입니다. 그러나 그 주인이 능히 지킬 수 없어, 이는 거의 하늘이 장군께 주려는 것이니 장군은 취할 뜻이 있으십니까? 
 
익주(益州)는 험색(險塞-험준하고 막혀있음)하며 옥야(沃野-기름진 들판) 천리의 천부지토(天府之土-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한 땅)로, 고조(高祖-한고조 유방)께서 이에 의지해 제업(帝業)을 이루었습니다. 유장이 암약(闇弱-어리석고 나약함)하여 장로가 북쪽을 차지하고 있는데, 민은국부(民殷國富-백성은 넉넉하고 나라는 부유함)하나 백성들을 다독일 줄 모르니 지혜롭고 재주 있는 선비들은 명군(明君) 얻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제실(帝室-황실)의 후예인데다 사해에 신의(信義)를 떨쳤으며, 영웅들을 널리 받을어 들이며 현인 그리워하는 것을 목마른 사람이 물 찾듯 하십니다. 만약 형주, 익주를 타넘어 차지해 그 엄조(巖阻-험조)함에 기대고, 서쪽으로 제융(諸戎-여러 융족들)과 화친하고 남쪽으로 이월(夷越)을 어루만지며, 밖으로는 손권과 결호(結好-화친을 맺음)하고 안으로는 정리(政理-정치)를 닦으면서, 천하에 변고가 있을 때 한명의 상장(上將)에게 명해 형주의 군사를 이끌고 완(宛), 낙(洛-낙양)으로 향하게 하고 장군께서는 몸소 익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천(秦川)으로 출병하신다면, 단사호장(簞食壺漿-대나무 그릇에 담은 밥과 호리병의 국)으로 장군을 영접하지 않을 백성이 감히 누가 있겠습니까? 실로 이처럼 한다면 가히 패업(霸業)이 이루어지고 한실(漢室)이 흥할 것입니다.”
 
선주가 말했다, 
“옳은 말씀이오!” 
이에 제갈량과의 정이 날로 깊어졌다.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유비가 다독이며 말했다,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원컨대, 제군들은 이에 관해 다시 말하지 말라.” 
이에 관우, 장비가 불평을 멈추었다.
유표의 장자 유기(劉琦) 또한 제갈량을 매우 중시했다. 유표는 후처(後妻)의 말을 받아들여 작은 아들인 유종(劉琮)을 사랑하고 유기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不悅) 유기는 매양 제갈량과 더불어 스스로 안전할 수 있는 방책(自安之術)을 꾀하려 했으나 제갈량은 번번이 이를 거절하며 더불어 처획(處畫-상의하거나 계획함)하지 않았다. 이에 유기는 제갈량을 데리고 후원을 산책하다 함께 높은 누각에 올라 연회를 베푸는 사이 사람을 시켜 사다리를 치우게 했다. 
 
그리고는 제갈량에게 말했다, “오늘은 위로는 하늘에 이르지 않고 아래로는 땅에 닿지 않으니, 말이 그대 입에서 나와 제 귀로 들어갈 뿐입니다. 말씀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제갈량이 대답했다, “그대는 신생(申生)이 안에 있다가 위험해지고 중이(重耳)가 밖에 있다가 안전해진 것을 보지 못하셨소?” (※)
 
※ 신생(申生)은 진헌공(晉獻公)의 태자로 여희(驪姬)의 참소를 받아 자살하고, 중이(重耳)는 신생의 동생으로 나라 밖으로 달아나 목숨을 건지고, 오랜 세월 방랑하다 다시 돌아와 즉위함, 춘추5패의 하나인 진문공(晉文公)이 바로 중이입니다.

유기는 깨닫는 바가 있어 밖으로 나갈 것을 은밀히 꾀했다. 때마침 황조(黃祖)가 죽자 밖으로 나가 강하(江夏)태수가 되었다.  

갑자기 유표가 죽고, 유종은 조공이 와서 정벌한다는 것을 듣고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선주는 번(樊)성에서 이 일을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왔다. 제갈량은 서서와 함께 뒤따랐는데 조공이 추격해 격파하고 서서의 모친을 붙잡았다. 서서는 선주에게 이별을 고하며,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본래 장군과 함께 왕패(王霸)의 업을 도모하려 한 것은 이 방촌지지(方寸之地-사방 1촌의 땅. 가슴을 가리킴)에서였습니다. 지금 노모를 잃어 방촌(方寸)이 어지러워 일에 도움이 될 수 없으니 이에 작별을 청합니다.” 
 
그리고는 조공에게로 갔다.

선주가 하구(夏口)에 도착하자 제갈량이 말했다, 

 
“일이 급합니다. 명을 받들어 손장군(孫將軍-손권)에게 구원을 청하도록 해 주십시오.” 
 
이때 손권은 군을 거느리고 시상(柴桑-양주 예장군 시상현)에 있으면서 싸움의 성패(成敗)를 관망하고 있었다.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했다, 
 
“해내(海內)에 대란이 일자 장군께서는 군사를 일으켜 강동을 점거해 차지하고 유예주(劉豫州-예주목 유비)께서는 또한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거두어 조조와 천하를 다투었습니다. 지금 조조는 큰 어려움을 제거하고 대략 평정을 끝냈습니다. 마침내 형주까지 격파하여 위세를 사해(四海)에 떨쳐 영웅들이 용무(用武-용병)할 곳이 없으니 이 때문에 예주께서 둔도(遁逃-도피)하여 이곳에 이른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역량을 헤아려 대처하셔야 합니다. 만약 오(吳), 월(越)의 군사로 중국(中國)과 능히 맞설 수 있다면 (중국과) 일찍 관계를 끊느니만 못합니다. 만약 능히 당해낼 수 없다면 어찌 안병속갑(案兵束甲-무기를 내버리고 갑옷을 묶어 둠. 무장해제)하고 북면(北面)하여 조조를 섬기지 않습니까! 지금 장군께서는 겉으로는 복종의 명목을 내세우며 내심으로는 망설이십니다. 일이 급한데 결단하지 못하니 머지않아 화(禍)가 닥칠 것입니다!” 
 
손권이 말했다, “그대의 말대로라면 유예주는 어찌 끝내 조조를 섬기지 않는 것이오?” 

제갈량이 말했다, “전횡(田橫)은 제나라의 장사(壯士)이나 오히려 의(義)를 지키며 모욕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유예주께서는 왕실의 후예로, 영재(英才-뛰어난 재주)가 세상을 덮어 뭇 선비들이 모앙(慕仰-앙모)하는 것이 마치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듯 하는 분이니, 만약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곧 하늘의 뜻일 뿐, 어찌 남의 아래에 들어가겠습니까!”  
손권이 발끈하며 말했다, 
 
“나는 오(吳) 땅 전부와 10만 군사를 들어 남에게 제어당할 순 없소. 내 계책은 이미 정해졌소! 유예주가 아니면 조조를 당해낼 수 없소. 그러나 예주(豫州-유비)가 이제 막 패한 직후니 이 어려움에 어찌 대처해야 하겠소?” 
 
 제갈량이 말했다, 
 
“예주(豫州-유비)의 군이 비록 장판(長阪)에서 패했으나 지금 돌아온 전사(戰士-병사)와 관우의 수군(水軍)이 정갑(精甲-정병) 만 명이고, 유기(劉琦)가 합한 강하의 전사 또한 최소한 만 명입니다. 조조의 군사는 멀리 와서 피폐해졌고, 제가 듣기로 예주(豫州-유비)를 추격해 경기(輕騎-경기병)로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왔다 하니, 이는 이른바 ‘강노(强弩-강한 활, 쇠뇌)가 끝에 이르러서는 노나라의 명주 천도 뚫을 수 없다’(强弩之末, 勢不能穿魯縞)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병법에서 이를 꺼려 ‘필히 상장군(上將軍)을 꺾이게 하다’(必蹶上將軍)고 했습니다. 
게다가 북방 사람들은 물싸움에 익숙지 않고 또한 조조에 귀부한 형주민은 병세(兵勢-군세, 병력)에 핍박당한 것이지 마음으로 복종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장군께서 실로 맹장(猛將)에 명해 수만 군사를 이끌며 예주와 협력하여 힘을 모으면 필히 조조 군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조조군 이 격파되면 틀림없이 북쪽으로 돌아갈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형(荊), 오(吳)의 세력이 강해져 정족(鼎足-솥발)의 형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패의 계기는 금일에 달려 있습니다.”  
 
손권이 크게 기뻐하며 주유(周瑜), 정보(程普), 노숙(魯肅) 등 수군 3만을 보내 제갈량을 따라 선주에게로 나아가 힘을 합해 조공에 맞서게 했다.

조공은 적벽(赤壁)에서 패하자 군을 이끌고 업(鄴)으로 돌아갔다. 선주는 마침내 강남(江南-장강 남쪽)을 거두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으로 삼아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감독하며 부세(賦稅)를 거두어 군실(軍實-군대의 무기와 양식)을 채우게 했다.

건안 16년(211년), 익주목 유장(劉璋)이 법정(法正)을 보내 선주를 영접하고 장로(張魯)를 공격하게 했다. 제갈량은 관우와 함께 형주를 진수했다. 선주가 가맹(葭萌-익주 광한군 가맹현)에서 돌아와 유장을 공격하니, 제갈량은 장비, 조운 등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군현들을 나누어 평정하고, 선주와 함께 성도를 포위했다. 

 
성도가 평정되자 제갈량을 군사장군(軍師將軍-참모장)으로 삼고 좌장군부(左將軍府-유비가 그때 좌장군)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  선주가 밖으로 출병하면 제갈량은 늘 성도를 진수하며 식량과 병사를 대었다. 
 
건안 26년(221년), 군하(群下-뭇 수하)들이 선주에게 황제를 칭할 것을 권하자 선주는 허락지 않았다.  
 
제갈량이 설득했다, 
 
“옛날 오한(吳漢), 경엄(耿弇) 등이 처음 세조(世祖-후한 광무제 유수)께 제위에 오를 것을 권하니 세조께서 사양한 것이 앞뒤로 네 번쯤 됩니다. 그러자 경순(耿純)이 진언하길, ‘천하 영웅들이 우러러 따르며 소망하는데, 만약 의견에 따르지 않는다면 사대부들은 각각 돌아가 주인을 찾을 것이고 공을 따르는 이가 없게 될 것입니다’라 하니, 세조께서 경순의 말이 심히 지극함에 감격하시어 마침내 허락하셨습니다. 
 
지금 조씨(曹氏)가 한(漢)을 찬탈하여 천하에 주인이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유씨(劉氏)의 묘족(苗族-일가 피붙이)으로 세계(世係)를 계승해 몸을 일으켰으니 지금 제위에 오르심이 마땅합니다. 대왕을 따라 오랫동안 근고(勤苦-부지런히 힘씀)한 자들이 또한 경순의 말처럼 척촌(尺寸-일척 일촌. 작고 사소함)의 공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에 선주가 제위에 오르고 제갈량을 승상(丞相)으로 삼으며 책문(策文)에서 말했다, 
 
“짐은 황실이 불행을 만나 대통(大統)을 봉승(奉承)하고, 삼가고 두려워하며 감히 스스로 강녕(康寧-건강하고 편안함)함을 꾀하지 않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려고 하나 능히 그럴 수 없을까 두렵도다. 아! 승상 제갈량은 짐의 뜻을 다하여, 짐의 허물을 보좌하는데 태만하지 말고, 중광(重光-누세의 성덕)을 선양하는 것을 도와 천하에 비추도록 할 것이니, 그대는 힘쓸지어다.” 
 
제갈량을 승상 녹상서사(錄尙書事-행정장관), 가절(假節-군법을 어긴사람을 죽일수있는 권한)로 삼았다. 장비가 죽은 후 사례교위(수도 근처~)를 겸하게 했다.

장무 3년(223년) 봄, 선주는 영안(永安)에서 병이 깊어지자 성도에 있던 제갈량을 불러 뒷일을 부탁했다. 제갈량에게 말했다, 

“그대의 재능이 조비의 열 배에 달하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시고, 그가 재능 있는 인물이 아니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도록 하시오.”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이 감히 고굉지력(股肱之力-신하로서의 헌신)을 다하고 충정지절(忠貞之節-충정의 절개)에 힘쓸 것이니, 죽기로 계속할 것입니다.” 
 
선주는 또 후주에게 조칙을 내렸다, 
 
“너는 승상과 함께 일을 처리하고 승상을 이 아비처럼 섬겨라.” 

건흥(建興) 원년(223년), 제갈량을 무향후(武鄕侯)에 봉하고 부서를 열어 정무를 처리하게 했다.(개부치사 開府治事) 얼마 후 또 익주목을 겸하게 했다. (영 익주목) 대소 정사(政事)를 막론하고 모두 제갈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남중(南中)의 여러 군(郡)이 아울러 반란을 일으켰는데, 제갈량은 이제 국상을 당했으므로 곧바로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고, 또한 오(吳)에 사자를 보내 화친을 맺어 마침내 여국(與國-우호국, 동맹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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