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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關羽)는 자(字)가 운장(雲長)이고 본래 자(字)는 장생(長生)이며 하동(河東)군 해(解)현 사람이다. 망명하여 탁군(涿郡-유주 탁군)으로 달아났다. 선주(先主-유비)가 향리(鄕里-태어난 마을에서)에서 도중(徒衆-무리)을 모으니 관우는 장비(張飛)와 함께 그를 위해 적을 막아냈다.

 

 

 

선주가 평원상(平原相)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 장군수하 하급무관)로 삼고 부곡(部曲 - 사병)을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선주는 두 사람과 함께 잠자며 같은 침상을 썼고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종일토록 선주(유비) 옆에 있었고 , 선주를 따라 떠돌아다니며 고난과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선주는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습격해 죽이고, 관우에게 하비성(下邳城)을 지키며 태수의 일을 행하도록 하고(行太守事)  자신은 소패(小沛)로 돌아갔다.

건안 5년(200), 조공(曹公-조조)이 동쪽을 치자 선주는 원소(袁紹)에게로 달아났다. 조공은 관우를 사로잡고 돌아와 편장군(偏將軍 낮은 직위의 장군)에 임명하고 매우 두텁게 예우했다.  

원소가 대장(大將) 안량(顔良)을 보내 동군(東郡)태수 유연(劉延)을 백마(白馬)에서 공격하자, 조공은 장료(張遼)와 관우를 선봉(先鋒)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병거에 달린 대장기 덮개)를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해서 달려가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刺) 그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제장(諸將 여러 장수)들 중 당해 낼 자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조공(曹公)이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했다.
 
당초 조공은 관우의 사람됨을 크게 여겼으나 그의 심신(心神-마음)에 오래 머물 뜻이 없음을 살피고는 장료에게 이르길

“경이 시험 삼아 그의 뜻을 물어보시오”

라고 했다. 그 뒤 장료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조공께서 후히 대우 해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유장군(劉將軍-좌장군 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이를 저버릴 수는 없소. 나는 여기 끝까지 머물 수는 없으나 반드시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한 뒤에 떠날 것이오.” 
 
장료가 관우의 말을 조공에게 보고하니 조공이 이를 의롭게 여겼다.
 
관우가 안량을 죽이게 되자 조공은 관우가 필시 떠날 것임을 알고 포상을 더욱 무겁게 베풀었다. 관우는 하사받은 것을 모두 봉해 놓고 작별을 고하는 서신을 올린 후 원소군에 있던 선주(先主)에게로 달아났다. 좌우(左右)에서 이를 추격하려 하자 조공이 말했다, 
 
“그는 각기 자신의 주인을 위한 것이니 뒤쫓지 말라.
 
선주(先主)를 따라 유표(劉表)에게로 나아갔다. 유표가 죽고 조공이 형주(荊州)를 평정하니, 선주는 번(樊)성으로부터 장차 남쪽으로 가 장강을 건너려 하며, 따로 관우를 보내 수백 척의 배를 타고 가게 해 강릉(劉表)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공이 추격하여 당양(當陽) 장판(長阪)에 이르렀고, 선주는 한진(漢津)으로 가다가 때마침 관우의 배와 서로 만나게 되어 함께 하구(夏口)에 도착했다.

손권이 군대를 보내 선주를 도와 조공을 막았고 조공이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선주는 강남(江南-장강 남쪽)의 여러 군을 거두어들이고는 으뜸 되는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관직를 주었으며 관우를 양양(襄陽)태수 탕구장군(盪寇將軍-잡호장군 중 하나 )으로 삼아 강북(江北-장강 북쪽)에 주둔하게 했다. 선주가 서쪽으로 익주(益州)를 평정할 때 관우를 동독형주사(董督荊州事-형주의 사무를 지휘 감독)로 임명했다. 

관우는 마초(馬超)가 항복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예전부터 친분, 내왕이 있는 이가 아니기에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사람됨과 재주가 누구에 비교될 수 있는지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의 호승심이 강함을 알았으므로 이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맹기(孟起-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웅렬(雄烈-굳세고 맹렬함)이 남보다 뛰어난 일세의 호걸로 경포(黥布), 팽월(彭越)과 같은 무리입니다. 응당 익덕(益德-장비)과 말머리를 나란히 해 달리며 선두를 다툴 수는 있으나 염(髥-수염) 그대의 절륜(絶倫) 일군(群羣-출중함)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관우는 수염이 아름다웠으니 이 때문에 제갈량이 관우를 일컬어 염(髥)이라 한 것이다. 관우는 이 서신을 읽어보고 크게 기뻐하며 빈객(賓客)들에게 보여주었다.
 
일찍이 관우는 화살에 맞아 왼팔을 관통 당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비록 상처는 치유되었으나 몹시 흐리며 비오는 날이면 늘 뼈가 아팠다. 의원이 말했다, 
 
“화살촉에 독이 있어 이 독이 뼈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응당 팔을 갈라 상처를 내고 뼈를 깎아 내 독을 제거해야 하니 그 연후에야 이 통증이 없어질 것입니다.” 
 
관우는 이내 팔을 뻗어 의원에게 자신의 팔을 가르게 했다. 이때 관우는 때마침 제장들을 청하여 음식을 먹으며 함께 하고 있었는데, 팔에서 피가 흘러 반기(盤器-대야, 접시)에 가득 찼으나 관우는 구운 고기를 자르고 술잔을 끌어당겨 담소를 나누며 태연자약했다. 
 
건안 24년(219년), 선주(先主)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관우를 전장군(前將軍-사방장군 중 하나 선봉을 주로 맡음), 가절과 월(假節 鉞)을 주었다
이 해, 관우가 군사를 이끌고 번(樊)에서 조인(曹仁)을 공격했다. 조공이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을 돕게 했다. 가을, 큰 비가 내려 한수(漢水)가 범람하고 우금이 이끌던 7군(七軍)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했고, 관우는 또 장군 방덕(龐德)을 참수했다. 양(梁-사례 하남윤 양현), 겹(郟-영천군 겹현) 육혼(陸渾-홍농군 육혼현)의 군도(群盜-뭇 도적)들이 혹 멀리서 관우의 인호(印號-관인과 봉호)를 받아 그의 일당이 되었고 관우의 위세가 화하(華夏-중국)를 진동했다. 
조공이 허도(許都)를 옮겨 그 예봉을 피할 것을 의논했는데,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과 장제(蔣濟)가 말하길, ‘관우가 뜻을 이루는 것을 손권이 필시 원하지 않을 것이니 가히 사람을 보내 손권이 그 배후를 치도록 권할 만합니다. 강남(江南)을 떼어내어 손권을 봉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번(樊)의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라 했고 조공이 이에 따랐다. 
그 이전에 손권이 사자를 보내 자신의 아들을 위해 관우의 딸을 청한 일이 있는데, 관우가 그 사자를 모욕하며 혼인을 허락지 않으니 손권이 대노했었다

또 남군태수 미방(麋芳)이 강릉(江陵)에 있고 장군 사인(士仁)이 공안(公安)에 주둔했는데 (※) 그들 모두는 관우가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것에 평소 원한을 품었었다.

관우가 출군한 이래 미방, 사인은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그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자 관우가 ‘돌아가면 응당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했다. 이에 손권이 은밀히 미방과 사인을 꾀자 미방과 사인은 사람을 시켜 손권을 영접했다. 
 
한편, 조공은 서황을 보내 조인을 구원했고
관우가 이를 이기지 못하자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거하고 관우 사중(士衆-사졸)들의 처자를 모두 사로잡자 관우군이 마침내 흩어졌다.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역격(逆擊)하고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關平)을 임저(臨沮-형주 남군 임저현)에서 참(斬)했다.

관우에게 시호를 추증해 장무후(壯繆侯)라 했다.

 아들 관흥(關興)이 후사를 이었다

평한다.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세의 호신(虎臣-범 같은 신하)이었다. 관우는 조공(曹公)에게 보효(報效-힘써 보답함)하고 장비는 의(義)로써 엄안(嚴顔)을 놓아주었으니 아울러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관우는 강이자긍(剛而自矜-굳세고 자부심이 강함)하고 장비는 폭이무은(暴而無恩-난폭하고 은혜롭지 않음)하여 자신의 단점으로써 패망하게 되었으니 이수(理數-도리,이치)의 상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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