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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주(先主)는 성이 유(劉), 휘가 비(備)이고, 자(字)는 현덕(玄德)이다. 탁군(涿郡) 탁현(涿縣) 사람으로, 한(漢) 경제(景帝)의 아들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예이다

 
원수(元狩) 6년(B.C 117)에 유승의 아들 유정(劉貞)이 탁현의 육성정후(陸城亭侯)에 봉해졌으나, 주금(酎金) 문제에 좌죄되어 후작을 잃고 이로 인해 (지도에서 범양에) 일가를 이루었다.
 [주; 주금이란 매년 8월 천자가 종묘에 제사지낼 때, 제후왕이나 열후들이 부조형식으로 돕는다는 의미에서 봉헌하는 황금을 말합니다. 그런데 전한 무제 때(원수가 바로 무제 때의 연호중 하나입니다), 제후왕들의 세력을 꺾고 전제정치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이 주금에 불순물이 섞여 있다거나 정해진 양에 모자란다는 죄목으로 많이 이의 작위를 빼앗습니다. 유비의 조상도 이 때 걸린 것입니다]

선주(先主)의 조부 유웅(劉雄), 부친 유홍(劉弘)은 대대로 주군(州郡,중앙이 아닌 지역을 뜻하는듯)에서 복무했다. 유웅은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동군범령(東郡范令-연주 동군 범현의 현령)에 이르렀다.

선주(先主-유비)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친과 함께 신발을 팔고 자리 엮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집 남동쪽 모퉁이 울타리 위에 뽕나무가 높이 자라 다섯 장(丈) 남짓 되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잎과 가지가 무성하여 마치 거개(車蓋-수레덮개)

처럼 보였다.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이 나무를 괴이하고 범상치 않게 여겼으며, 어떤 이는 이 집에서 응당 귀인(貴人)이 나올 것이라 했다

선주가 어릴 때 종중(宗中)의 여러 아이들과 함께 나무 아래에서 놀면서 말했다,
 
“나는 꼭 이렇게 깃털로 장식된 덮개가 있는 수레에 탈거야.” 
 
숙부 유자경(劉子敬)이 말했다, 
 
“너는 허튼소리 말거라. 우리 가문을 망치겠구나!”
 
15 세가 되자 모친이 학문을 익히도록 하자, 동종(同宗)인 유덕연(劉德然), 요서(遼西) 사람인 공손찬(公孫瓚)과 함께 예전에 구강(九江)태수를 지낸 같은 군(郡) 출신의 노식(盧植)을 섬기게 되었다. 유덕연의 부친인 유원기(劉元起)는 항상 선주에게 비용을 대어주어 유덕연과 똑같이 대했다. 
 
유원기의 처가 말했다, 
“각자가 따로 일가를 이루고 있는데 어찌 항상 이처럼 도울 수 있겠습니까!” 
 
유원기가 말했다, 
 
“우리 종중의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오.” 
 
공손찬과 깊이 교우를 맺었는데 공손찬의 나이가 더 많았으므로 선주는 그를 형으로 섬겼다. 
 
선주는 책 읽는 것은 아주 즐기지는 않고, 개나 말, 음악, 아름다운 의복을 좋아했다. 신장은 7척 5촌에 (173츠) 손을 아래로 내리면 무릎에 닿았고 눈을 돌려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 
말수가 적고 아랫사람들을 잘 대해주며 기쁨이나 노여움을 얼굴표정에 드러내지 않았고, 호협(豪俠)들과 교우를 맺는 것을 좋아하니 젊은이들이 다투어서 그를 따랐다. 
중산(中山-기주 중산국)의 대상(大商)인 장세평(張世平)과 소쌍(蘇雙) 등은 재산이 천금이었는데, 말 장사하러 탁군을 돌아다니다 선주를 보고는 그를 남다르게 여겨 많은 돈과 재물을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선주는 많은 무리들을 모을 수 있었다.
  
영제(靈帝:168-189) 말, 황건(黃巾)이 봉기하자 주군(州郡)에서 각각 의병(義兵)을 일으켰는데, 선주는 그 부하들을 이끌고 교위 추정(鄒靖)을 좇아 황건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안희위(安喜尉-중산국 안희현의 현위)에 제수되었다. 

독우(督郵-군郡의 감찰관) 가 공적인 일로 (안희)현에 도착했다. 선주가 그를 만나기를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곧바로 들어가 독우를 묶고 장(杖) 2백 대를 때렸다. 그리고 인끈을 풀어 그의 목에 걸고는 그를 말뚝(馬枊)에 묶어두고 관직을 버린 채 달아났다.

얼마 후 대장군 하진(何進)이 도위(都尉) 관구의(毌丘毅)를 보내 단양(丹楊)으로 가서 모병하게 했다. 선주가 그와 함께 행동하다가 하비(下邳)에 이르러 적(賊)을 만났는데, 힘써 싸워 공을 세우고 하밀승(下密丞-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다. 다시 관직을 버렸다. 그 뒤 고당위(高唐尉-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었다가 (고당현)령으로 승진했다

현이 적(賊)에게 격파되자 중랑장 공손찬에게로 달아났다. 공손찬은 표를 올려 (선주를) 별부사마(장군 밑에 사마중에 따라 수하를 둘수있음)로 삼고, 청주자사 전해(田楷)와 함께 기주목 원소(袁紹)를 막도록 했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자 잠시 평원령(平原令-평원국 평원현의 현령)을 맡고 그 뒤 평원상(平原相-평원국의 국상. 태수급)을 겸했다

군민(郡民)인 유평(劉平)이 평소 선주를 깔보며 그 아래에 있음을 수치스러워 하여, 객(客-문객, 노객)을 보내 선주를 찔러 죽이게 했다. 객(客)이 차마 찌르지 못하고 그 일을 털어놓고 떠나니, 그가 인심을 얻은 것이 이와 같았다.

원소가 공손찬을 공격하자 선주는 전해와 함께 동쪽으로 가서 제(齊 -청주 제국)에 주둔했다. 
 
조공(曹公-조조)이 서주(徐州)를 정벌하자(194년의 일) 서주목 도겸(陶謙)은 사자를 보내 전해에게 위급함을 고했고, 전해는 선주와 함께 이를 구원했다. 이때 선주는 스스로 군사 천여 명과 유주(幽州) 오환(烏丸)의 잡다한 호기(胡騎-이민족 기병)를 거느리고 있었고 또한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을 얻었다. 
 
서주에 도착한 후 도겸이 단양병(丹楊兵) 4천을 선주에게 보태어주자 마침내 전해를 떠나 도겸에 귀부했다. 도겸은 표를 올려 선주를 예주자사로 삼고 소패(小沛)에 주둔하게 했다. 
 
도겸은 병이 깊어지자 별가(別駕) 미축(麋竺)에게 말했다, 
 
“유비가 아니면 이 서주를 안정시킬 수 없소.” 
 
도겸이 죽자 미축은 주(州)의 백성들을 이끌고 선주를 영접했으나 선주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비의 진등(陳登)이 선주에게 말했다, 
“지금 한실(漢室)이 능지(陵遲-쇠퇴)하고 해내(海內-천하)가 뒤집어지려 하니, 공을 세우고 대사를 이루는 것은 금일에 달려 있습니다. 서주는 풍요롭고 호구(戶口)가 백만이니, 부디 사군(使君-주자사에 대한 경칭)께서 뜻을 굽혀 이 주(州)를 맡아 주십시오.” 
선주가 말했다, 
“원공로(袁公路-원술)가 가까이 수춘에 있소. 그는 사세오공(四世五公-4대에 걸쳐 삼공을 다섯 명 배출함)의 명문이고 해내가 그에게 귀부하고 있으니 가히 그에게 맡길 만하오.” 
 
진등이 말했다, 
 
“공로(公路)는 교호(驕豪-교만)하여 난을 다스릴만한 주인이 아닙니다. 지금 사군(使君)을 위해 보기(十萬) 10만을 모으려 하니, 가히 위로는 군주를 도와 백성을 구제하여 (춘추) 오패(五霸)의 업을 이루고, 아래로는 할지(割地-땅을 나누어 차지함)하여 변경을 지키며 공(功)을 죽백(竹帛)에 남길 만합니다. 만약 사군이 제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저 진등도 사군의 뜻에 따르지 않겠습니다.” 
 
북해상(北海相) 공융(孔融)이 선주에게 말했다, 
 
“원공로가 어찌 우국망가(憂國忘家-나라를 걱정하느라 집안일을 잊음)할 자겠소? 무덤 속에 있는 (원씨 조상의) 고골(枯骨-해골)을 어찌 개의한단 말이오? 오늘의 일은 백성이 유능한 이에게 맡기자는 것이니,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고 뒷날 후회해도 늦을 것이오.”
 
이에 선주가 서주를 다스리게 되었다

원술이 와서 선주를 공격하자 선주는 우이(盱眙-하비국 우이현.=盱台), 회음(淮陰-하비국 회음현)에서 이를 막았다. 조공(曹公-조조)이 표를 올려 선주를 진동장군(갖가지 명목의 잡호장군으로 장관과 비슷한 직위)으로 삼고 의성정후(宜城亭侯)에 봉하니, 이 해가 건안 원년(196년)이다. 

 
선주는 원술과 한 달 넘게 서로 대치했는데, 여포가 빈틈을 타 하비를 습격했다. 하비의 수장(守將) 조표(曹豹)가 배반하고 그 틈에 여포를 맞아들였다. 여포가 선주의 처자(妻子)를 사로잡자 선주는 군을 돌려 해서(海西)에 주둔했다.
 
양봉(楊奉), 한섬(韓暹)은 서주(徐州), 양주(揚州) 사이에서 도적질했는데, 선주가 이를 격퇴하고 모두 참수했다. 선주는 여포에게 화친을 구하고 여포는 선주의 처자를 되돌려 보냈다. 선주는 관우(關羽)를 보내 하비를 지키게 했다.
  
선주는 소패(小沛)로 돌아와 다시 군사를 합쳐 만여 명을 얻었다. 
여포가 이를 꺼려 친히 출병해 선주를 공격했고 선주는 패주해 조공(曹公-조조)에게 귀부했다. 조공이 그를 후대하고 예주목(豫州牧)으로 삼았다. 장차 패(沛)로 가서 흩어진 군졸들을 거두려 하자, (조공은) 군량을 대어주고 군사들을 보태어 동쪽으로 여포를 공격하게 했다. 여포가 고순(高順)을 보내 이를 공격하자 조공은 하후돈(夏侯惇)을 보냈으나 능히 구원할 수 없었고 고순에게 패했으며, (고순은) 다시 선주의 처자를 사로잡아 여포에게 보냈다. 
 조공은 친히 출병해 동쪽을 정벌하고 선주를 도와 하비에서 여포를 포위했다가 사로잡았다
선주는 다시 처자를 되찾고, 조공을 따라 허도로 되돌아왔다. 표를 올려 선주를 좌장군(잡호장군보다 조금 높음)으로 삼고 예우가 더욱 중해지니 출행할 때는 같은 수레에 타고 앉을 때는 같은 자리에 앉았다. 
 
원술이 서주를 지나 북쪽으로 원소에게 가려고 하자, 조공은 선주를 보내 주령(朱靈), 노초(路招)를 이끌고 원술을 요격(要擊)하게 했는데, 도착하기 전에 원술이 병으로 죽었다. 선주가 출발하기 전, 헌제(獻帝)의 구(舅-장인) 거기장군(궁궐을 보위하는 높은 직위의 장군) 동승(董承)이 이르길 황제의 의대(衣帶)를 받으니 그 속에 조공을 주살하라는 밀조(密詔)가 있었다고 했다. 선주는 아직 실행하지 못했다. 
이무렵 조공이 선주에게 조용히 말했다, 
“지금 천하의 영웅은 오직 사군(使君,주목을 이르는말)과 나 조조뿐이오. 본초(本初-원소) 같은 무리는 족히 여기에 낄 수 없소.” 
선주는 막 밥을 먹고 있다가 비저(匕箸-수저)를 떨어뜨렸다

마침내 동승, 장수교위(황궁 경호부대무관) 충집(种輯), 장군 오자란(吳子蘭), 왕자복(王子服-후한서에 의하면 왕복王服)등과 함께 공모했는데, 때마침 원술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어 실행하지 못했다. 일이 발각되어 동승 등이 모두 복주(伏誅-처형)되었다.

선주가 하비를 점거하고, 주령 등은 되돌아왔다. 이에 선주는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죽이고, 관우를 남겨 하비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왔다

동해(東海)의 창패(昌霸)가 모반하고 군현들 다수가 조공(曹公)을 배반하고 선주 편에 서니 그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고, 손건(孫乾)을 보내 원소와 연화(連和-연결하여 화친함)했다. 조공이 유대(劉岱), 왕충(王忠)을 보내 이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건안 5년(200년), 조공이 동쪽으로 선주를 정벌하자 선주가 패적(敗績-대패)했다.

조공은 그 군사들을 모두 거두고 선주의 처자를 붙잡고, 아울러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선주는 청주(靑州)로 달아났다. 청주자사 원담(袁譚)은 선주의 옛 무재(茂才,자사가 천거하는자)였기에 보기(步騎-보병과 기병)를 이끌고 선주를 맞이했다. 선주는 원담을 따라 평원에 도착했고 원담은 급히 사자를 보내 원소에게 고했다. 원소는 장수를 보내 도로에서 봉영(奉迎-영접)하고 자신은 업(鄴)에서 2백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선주와 서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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